[객원논설위원칼럼]김장권/직업정치인의 직무유기

  • 입력 2002년 8월 22일 18시 12분


온 국민이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대∼한민국’은 축구로는 세계 4강의 신화를 일구었지만 국가체제 면에서는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 우선 사회질서와 기강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통령 집안을 필두로 정치가 공직자 연예계, 심지어 교육계에까지 온갖 비리와 부정이 판을 치고 있다. 허약한 경제는 시계(視界)가 불투명하며 빈부격차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바깥으로도 미국과는 북한 문제로, 일본과는 교과서 문제로, 중국과는 탈북자 및 마늘 문제 등으로 편치 않은 관계다.

▼힘들고 위험한 3D직종▼

나라 안팎으로 처절한 생존경쟁이 격화되고 있지만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국민은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안 되겠다고 근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생업에 바쁘다 보니 쓴 소주잔이나 기울일 뿐이다. 누가 나서서 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나갈 것인가.

한때 군인들이 자청하여 나서기도 했고 대학생들이 우국충정으로 나서기도 했지만 결국 문제의 해결사는 직업정치가들이어야 한다. 그들의 직무는 비록 화려해 보이기는 하나 사실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3D 직종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대신 그 힘든 일을 할 수 있도록 엄청난 공권력이 부여되고 거액의 공금 관리권이 주어지며 꽤 높은 보수도 지불되는 것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게도 지금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 해결사를 자임하며 나라의 장래를 떠맡겠노라 머리를 맞부딪치며 나서고 있지만 그 각축의 모습을 보면 도리어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국민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보려는 게 아니다. 어려운 나라의 경영을 안심하고 맡길 만한 능력의 소유자와 그 청사진을 고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경기는 공사수주(工事受注)를 위한 사업설명회처럼 자신의 경영능력과 사업계획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국민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아 ‘공사’를 따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세기에 투사로 길들여진 우리의 해결사들은 상대방을 무찔러 넘어뜨리기에 여념이 없다. 사업설명회를 기대하고 모였다가 업자들이 서로 멱살을 쥐고 싸우는 꼴만 보고 있는 셈이다. 삼류 활극같은 장면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인데 마냥 보고 앉아 있기에는 우리의 상황이 너무도 절박하다.

지금은 정치가들이 이 나라의 위기를 감지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고심해야 할 때다. 국가 지도자와 국가운영의 청사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국민이지만 그 선택이 올바르고 용이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직업정치가들의 책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정치권은 어떤 지도자, 어떤 국가전략이 타당한지를 숙의해 선택 가능한 여러 대안을 국민 앞에 내 놓는 일을 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직업정치가들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정당 간판을 바꾸겠다느니, 신당을 만들겠다느니 우왕좌왕하는가하면 경륜을 따지기에 앞서 인기 있는 유명인사나 좇아 다니고 틈만 나면 서로 헐뜯고 흠집 내느라 날을 지새고 있다. 도대체 나라의 장래를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정치가라는 직종은 일종의 독과점 업종이어서 시장논리가 잘 적용되지 않는다. 축구에서는 거스 히딩크 같은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지만 정치사령탑은 그런 식으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독과점 판이라고 해서 우리 정치가들이 방심할 일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심을 따르라’는 기본 철학을 준수해온 직업정치가들만이 장수하여 아름다운 끝맺음을 해왔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민심이 어떤 것인지는 최근 두 번의 선거를 통해서 확인된 바 있다. 사상 최저의 투표율은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임이요, 야당의 압승은 현 정권에 대한 불신임이다. 정치권 전반에 대한 국민의 꾸지람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국가운영의 청사진과 차기 리더십에의 비전을 중심으로 민심을 다시 끌어 모아야 한다. 병역비리 문제도 중요하지만 사법부가 결론을 낼 때까지 더 이상 불필요한 논란으로 힘과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신당을 만들려면 원칙과 이념에 기초하여 정도(正道)를 따라 추진하고 거대 야당이라고 해서 자만하거나 경거망동하지 말고 정국을 책임 있게 풀어 나가는 데 힘쓸 일이다.

▼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

한때 ‘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라는 말이 유행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자 많은 사람이 결국 삼류정치가 일류경제를 망쳤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삼류정치는 경제만 망치는 게 아니라 결국 나라 전체를 망치는 법이다. 잘못된 정치가 어떻게 나라 전체를 망쳐왔는지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운 역사 속에서 뼈저리게 확인해 오지 않았던가.

김장권 서울대 교수·정치학 jk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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