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오아시스' 상처 입은 영혼에 ‘사랑의 샘물’

  • 입력 2002년 8월 23일 14시 32분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 ‘오아시스’는 소재 및 주제로 볼 때 한국 영화사에서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최초의 극영화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이창동 영화를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사실적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애인의 사랑을 이처럼 고결하고도 가슴 저미게 다룬 영화는 이전에 없었다’는 식의 평가 역시 상투적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장애인의 사랑을 영화적으로 승화시켰다’는 것 역시 정곡을 찌른 말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팬터지’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 영화 ‘오아시스’의 줄거리만 보고 이 영화가 한 전과자와 한 장애인 간의 운명적 사랑을 그린 것인 줄로만 알았다. 전과자인 남자가 장애인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는데, 편견에 사로잡힌 주변 사람들은 그런 속내를 몰라주고 가해자와 피해자로 몰고 간다는 내용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을 확인한다는 다소 예측 가능한 결론을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런 것이라면 TV에서 가끔 방영해 주는 인간승리의 기록물을 통해 신물이 날 만큼 보아오지 않았던가.

사실 이 영화는 장애인간의 사랑얘기는 아니다. 어쩌다 한공주(문소리)를 좋아하게 된 홍종두(설경구)는 비록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건달청년이긴 하지만 정신지체아는 아니기 때문이다. 홍종두라는 캐릭터는 독특하지만 그렇다고 희귀종은 아니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유형의 인간인데, 바로 그런 그의 천진함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으로 무능력자로 낙인찍히고 이용당한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겉으로 볼 때 이른바 정상인과 비정상인 간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파생되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심오하다.

이 영화는 사람이 자연인으로 태어나서 사회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그 어떤 사회성 짙은 영화들보다도 심도 있게 포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교훈적이지 않다는 데 이 영화의 미덕이 있다.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자신을 맞추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이 영화의 표현대로 하면, 이런 것들이 될 터이다.

교통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시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가족들 잔치자리에 장애인 같은 불청객을 불러들여서도 절대 안 된다. 장애인을 대중음식점에 데려가서도 안 된다. 하물며 장애인을 친구로 사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비록 가족의 일원이라도 장애인과 함께 거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그러나 장애인 가족을 빌미로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챙기는 것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창동 감독은 이처럼 우울한 얘기들을 결코 심각하지 않은 어조로 지극히 담담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간다.

영화 ‘오아시스’는 당연한 얘기지만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특히 산업사회 속에서 불가피하게 촉진되는 가족의 해체라는 주제의식도 그렇고, 스타일상에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경향도 그의 작가주의적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이창동 감독은 데뷔작 ‘초록물고기’에서 이미 맏형 역을 뇌성마비 장애인 캐릭터로 설정함으로써 ‘오아시스’의 출현을 예고했다. 또한 한국형 리얼리즘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박하사탕’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 역으로 동반 출연했던 설경구와 문소리가 호흡을 맞춘 것도 예사롭지 않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전생’에서 못다 이룬 사랑의 꿈을 영화적으로 실현시킨 셈이랄까. 이창동 감독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맥락에서 자주 논의되는 상호텍스트성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과 전작들 간에 차이가 있다면, ‘오아시스’의 경우 몽환적 요소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져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중증 장애인이다 보니 연기자나 관람객이나 모두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영화적 팬터지로 이를 벌충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한공주가 어느 순간 장애인 상태를 벗어나 노래하고 춤까지 추는 장면은 다소 과잉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것이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테니 말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아시스’는 주제의식을 넘어선 영화적 재미를 준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그가 만든 세 편의 영화 가운데 가장 밝다. 이는 ‘동정 없는 세상’에 살면서도 결코 심각한 척하지 않는 홍종두 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 설경구의 연기에 힘입은 바 크다. 자연인의 이미지를 몽땅 망가뜨리면서까지 열연한 문소리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상업성이 우선하여 작가적 진정성이 결여된 요즘, 불모의 한국 영화판에서 결코 고갈되지 않을 영화가 바로 ‘오아시스’다.

<김시무/영화평론가> kimseemoo@hanmail.net

Tips :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텍스트를 두고 서로 인용하고 차용한다는 뜻을 가진 이 용어는 1970년대 포스트 구조주의 문학이론가들이 널리 사용했다. 이후 영화에 영향을 미쳐 유럽의 영화감독들도 이를 자주 사용했는데, 자신의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몇 장면을 다음 작품에서 재인용하거나 다른 감독의 영화를 차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오마주(존경의 표시)도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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