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사이에 김두한의 일본식 이름 ‘긴또깡’이 유행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재미로 따지면 이 드라마는 김두한의 어린 시절이 고비였다. 김두한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액션 장면도 보여줄 수 없어 어려움이 있었다. 고비는 넘긴 것 같다.”
-김두한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인물이다. 다시 그를 선택한 이유는.
“이전 작품들이 김두한을 자주 다뤘지만 그것은 한 시대를 풍미한 ‘주먹’의 이미지였다.내가 하는 작업은 김두한의 삶에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를 입히는 것이다. 인물과 역사가 제대로 결합된 드라마가 된다면 봐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김두한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나.
“우리 현대사에서 주먹은 많았지만 김두한만한 ‘협객’은 드물었다. 김두한은 국회의원을 했지만 뒤늦게 한글을 깨우치고 국회에 똥물을 뿌리는 역사의 야인이자 변두리 인생이다.”
-김두한을 드라마로 다루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내 ‘짝사랑’은 88년 주먹의 세계를 다룬 KBS ‘무풍지대’를 집필하면서 시작됐다. 이 드라마에서는 정치 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주요 인물이었고 김두한은 주변 인물로 등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주먹 세계에 정치를 어설프게 입힌 드라마였다. 시청률은 괜찮았다. 하지만 ‘명색이 작가라면서 역사의 본질이 빠진 드라마로 먹고 살아야 하는 가’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때 김두한을 꼭 제대로 한번 만나겠다고 마음 먹었다.”
‘무풍지대’와 얽힌 사연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씨는 작품 취재를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만나고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임화수의 비서로 ‘눈물의 곡절’이란 별명을 가진 차모씨가 드라마 내용에 불만을 품고 폭탄을 갖고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야인시대’에서는 비슷한 어려움이 없나.
“김두한의 어린 시절을 주로 다뤄 아직 그런 일은 없다.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주먹은 물론 현대 정치사의 실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드라마 자료는 어떻게 취재하나.
“김두한 본인의 회고록과 당시 주요 인물을 다룬 논문 50여편을 공부했다. 정말 공부였다(웃음). 옛 동아방송의 ‘노변야화’에서 2개월간 김두한과 대담한 것을 녹음했다. 김두한의 육성이 실린 중요한 자료로 드라마 집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1950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건설현장과 공장 등에서 100여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81년 KBS TV문학관 ‘갯바람’으로 데뷔한 뒤 ‘무풍지대’ ‘훠이훠이’ 등 주로 선이 굵은 남성풍의 작품을 썼다. 오랜 무명의 설움을 겪다 ‘용의 눈물’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사극 작가가 됐다. 대장암 때문에 세차례나 큰 수술을 한 아내를 간호하며 눈물로 작품을 써온 순애보와 뚝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극 작가가 됐다. 시대물을 포함해 당신이 생각하는 사극은 어떤 것인가.
“사극은 역사 교과서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도 아니다. 교훈과 재미가 모두 필요하다. 고려사를 다루면서 광종 시절에에 큰 사건이 없어 건너뛰자는 주장도 있지만 재미없다고 역사를 건너뛸 수 야 있나.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개인의 삶과 역사를 접목시킨 것이다.”
이씨는 지난해 MBC에서 방송 작가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고 정치 드라마를 집필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구체적인 계약조건을 밝힐 수 있나.
“밝히기 어렵다. 어쨌든 최고 대우를 받았다. 내년 가을경 방영될 정치드라마에서는 이전 드라마들과 달리 박정희가 중심 인물로 다뤄질 것이다.”
-한때 10년간 KBS에서 드라마를 통해 고려사 전체를 정리하자고 약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나는 한해 100회씩 10년을 계약하자고 제안했었다. 작가 생명을 걸고 10년간 한 작업에 매달리는만큼 그만한 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KBS는 장기 계약이 힘든 것 같더라.”
▼'김두한 붐' 이유있다▼
김두한의 이야기가 왜 다시 인기를 끄는걸까?
건양대 김탁환 교수(국문학)는 “김두한은 결국 일제 강점기에 주먹으로 애국한 것 아니냐”며 “사회적 소수이나 힘에 맞서는 그의 근성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것 같다”고 밝혔다.
김두한을 다룬 본격적인 문화상품은 90년 개봉된 영화 ‘장군의 아들’(연출 임권택). 당시 이 작품은 한국 영화 흥행 최고 기록인 67만명(서울기준)을 기록했다. 첫편의 흥행 성공으로 92년까지 두편의 속편이 제작됐다.
제작자인 태흥영화사 이태원사장은 “88년 5공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이 한결같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모르겠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다”며 “김두한을 통해 ‘사내’의 의리와 우정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권 교체기를 맞아 ‘배신’과 ‘협잡’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다시 일고 있는 ‘김두한 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특히 김두한은 ‘남성’이 거세되는 이 시기에 진정한 사내의 힘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심리가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는 “시청자들에게 김두한은 시련을 극복한 영웅이자 ‘정의의 폭력’을 행사할 줄 아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며 “시청자들은 ‘단순 깡패’가 아닌 ‘협객 김두한’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야인시대’가 첫 회를 김두한의 ‘오물 투척 사건’으로 시작한 것도 상징적이다. 1966년 9월 사카린 밀수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는 가운데 연단에 오른 김두한(김영철)이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한 것.
주 교수는 “오물투척사건과 답답한 요즘 정치 상황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상당수 시청자가 이 장면을 보면서 웃음과 함께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