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한국영화 ‘페르소나’ 전성시대

  • 입력 2002년 8월 30일 16시 27분


페르소나는 ‘마스크’를 뜻하는 라틴어로, 원래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최근에는 특정 감독의 작가적 분신으로서 특정 배우의 이미지를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해외 영화계에서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 오우삼 감독과 주윤발,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크 카프라 감독과 제임스 스튜어트,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과 아내이기도 했던 리브 울만 등 감독과 짝을 이루며 감독의 작가적 주제를 변주하는 배우들이 적잖았다.

한국 영화계에도 페르소나의 시대가 도래했다. 국내에서는 최근 2~3년 들어 비로소 감독의 페르소나라 할 만한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찰떡궁합, 명콤비, ○○사단 등으로 친분을 유지할 뿐 아니라 감독이 추구하는 인물적 주제를 변주하는 특정 배우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전과3범의 남자와 장애인 여자 등 사회적 주변인을 등장시켜 ‘멜로 끼를 뺀 새로운 멜로’를 추구한 이창동 감독의 신작 ‘오아시스’에는 그의 페르소나 설경구가 출연한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박하사탕’에 이어 두 번째. 무명에 가깝던 설경구를 진지하고 큰 연기파 배우로 각인시킨 것은 “나 돌아갈래”라며 양팔을 뻗어 외치는 ‘박하사탕’의 영호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두 사람은 인간적인 교감과 거의 절대적인 상호 신뢰를 갖추고 있어, 설씨는 ‘오아시스’ 출연을 위해 전작 ‘공공의 적’에서 불어난 10여kg의 몸무게를 단숨에 빼버리는 성의를 보여주기도 했다. ‘박하사탕’의 80년대 악질 형사 영호, ‘오아시스’의 전과3범 홍종두는 언뜻 동일선상에 놓기 어려운 인물처럼 보이지만, 자기모순을 가진 주변부 인물이고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통념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감독의 주제를 반영하는 유사한 인물이다.

▼이창동-설경구, 김기덕-조재현 ‘척척’▼

설경구는 ‘오아시스’ 시사회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혹독한 일을 자처해서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변태”라는 말로 감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설경구 문소리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한 의존도가 아주 높은데 영화를 보면 감독에 대한 배우의 애정과 신뢰, 나아가 존경심이 배우의 열연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곧 영화를 끌어가는 힘임을 알 수 있다.

‘오아시스’에서 장애인 한공주를 연기한 문소리 역시 ‘박하사탕’에 이어 이감독과 두 번째 호흡을 맞췄다. ‘박하사탕’에서 문소리의 배역은 영호의 첫사랑. 비중은 아주 작았지만 한공주 역과 마찬가지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상징으로, 감독의 여성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배우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이창동 문소리 콤비는 앞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촬영하는 작품마다 논란을 빚는 문제적 감독 김기덕의 페르소나는 ‘나쁜 남자’ ‘수취인 불명’ ‘야생동물보호구역’ ‘악어’ 등에 잇따라 출연했던 조재현. 김감독의 절망적인 현실 인식을 반영하듯 뒤틀리고 부조리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가부장적이고 왜곡된 남성성을 대표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부조리한 인간성 자체에 방점이 찍힌 인물.

작품에 대한 찬사 못지않게 쏟아지는 악평 속에서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저예산 영화제작을 묵묵히 감당해 온 동지와도 같은 사이로, 애증이 엇갈리는 관계로도 유명하다. 김감독을 확실히 작가적 위치에 자리매김한 ‘나쁜 남자’의 성공 이후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유로워져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김감독의 새 영화 ‘해안선’에는 스스로 그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자청, 적은 출연료를 감수한 장동건이 출연하고 있으며, 조재현은 SBS ‘피아노’로 성공적으로 주류 무대에 안착했다.

▼곽경택-유오성, 김성수-정우성도 콤비▼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없는 냉혹한 폭력 자체를 그린 하드보일드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 신하균은 각각 이 영화의 감독인 박찬욱 감독의 페르소나다. 이들은 박감독에게 상업적 성공을 안겨줬던 전작 ‘JSA공동경비구역’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간에 내재된 잔혹한 폭력성의 극한을 보여준 송강호는 동시에 기발한 코미디의 귀재 김지운 감독의 페르소나로도 각광받고 있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 ‘조용한 가족’ 등에서 우연히 큰 사건에 휘말리는 엉뚱하고 평범한 소시민을 연기한 송강호는 건조한 하드보일드 액션에서 기발한 코믹물에 이르기까지 변주의 폭이 넓은 배우임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개성적인 자기 세계로 신인배우들 중 단연 돋보이는 신하균은 역시 ‘영화계의 젊은 피’ 장진 감독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간첩 리철진’ ‘기막힌 사내들’ ‘킬러들의 수다’ 등에 출연했고 장진 감독이 이끄는 문화창작집단 ‘수다’의 멤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영화 이전 연극배우, 연극감독 작가시절부터 계속된 것. 합숙하며 연기연습을 해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을 만큼 애정을 주고받는 사이다. 동료이자 스승인 장진 감독에게 신하균이 깍듯이 예우를 갖추는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친구’ ‘챔피언’의 곽경택 감독과 유오성도 돈독한 친분을 과시한다. 두 작품 모두에서 특유의 강렬한 남성성을 선보였다. 몰락한 조폭(‘친구’), 경기장에서 사망하는 비운의 복서 김득구(‘챔피언’) 등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사나이의 의리와 비극적 종말을 강조하는 곽감독 특유의 ‘부산 싸나이 정서’를 표출하기에 유오성의 울퉁불퉁한 외모가 제격이다.

그 밖에 꽃미남 배우에서 깊이 있는 배우로 변신을 가능하게 한 ‘비트’를 시작으로 ‘태양은 없다’ ‘무사’ 등에 잇따라 출연한 정우성은 김성수 감독의 페르소나.

이처럼 한국 영화계에 페르소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한국 영화의 질적 성장의 한 단면이다. 굳이 작가주의 영화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감독이 작가적 주제를 인물을 통해 변주할 수 있는 여지가 봉쇄된 기획영화나 단순 상업영화의 경우, 페르소나라는 것이 애당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독 입장에서는 캐스팅난에도 불구하고 배우 확보에 유리하며, 또 오랜 공감대로 인해 인물해석, 연기 주문에 있어서 다른 배우보다 훨씬 호흡이 잘 맞아 결과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감독과 배우 모두 서로 매너리즘을 피하기 위해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도 한다.

여배우가 페르소나가 되는 경우가 드문 것은, 남성감독의 경우 자신의 작가적 분신으로서 여성보다는 남성배우를 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출처: 주간동아 3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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