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삼성그룹이 자동차사업 진출을 결정했을 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미래의 자동차는 전자장치나 마찬가지”라고
그 배경을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설명했다. 이에 대해 현대 대우 기아 등 자동차 3사를 비롯한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삼성이 전자사업에서 진검승부를 포기하고
자동차쪽으로 문어발을 편다’며 비난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삼성은 결국 수조원을 들인 자동차사업에서 철수했지만 이 회장의 비전은 틀리지 않았다. 자동차 제조원가의 30% 이상이 이미 전자장비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곳곳을 제어하고 운전의 즐거움을 주는 각종 전장품(전장품)은 자동차를 단순한 ‘탈것’에서 ‘이동하는 문화 및 업무보조수단’으로 바꿔놓고 있다. 대표적인 가전상품의 하나인 세탁기는 기껏 소형 디스플레이, 모터, 각종 와이어, 전자칩 등을 내장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자동차는 엔진블록과 조향장치, 외부 철판과 합성수지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자장치로 채워져 있다. 바야흐로 전자기기와 차의 경계가 무너지고 ‘e차’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e차’시대의 첨병들〓EF쏘나타 등 중형 승용차는 기본 옵션에 항법(航法)장치를 달면 전기 전자장치가 생산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5%를 넘는다고 한다. 전기모터와 가솔린엔진을 때에 따라 병용하는 하이브리드 차량은 70% 수준. 이쯤이면 탈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전자장비다.
이 정도 전자장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면 내장 칩의 ‘지능’도 뛰어나야 한다. 세탁기나 냉장고에 내장된 컴퓨터칩은 8비트급 하나지만 자동차에는 10∼60개의 각종 컴퓨터 칩이 내장돼 있으며 이 가운데 엔진제어 등에 쓰이는 칩은 펜티엄급인 32비트다.
e차 시대는 필연적으로 차량의 전기소모량을 늘린다. 자동차업체들이 기존 14V계 전원의 한계를 예상하고 42V 체계를 개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모비스의 부설연구소인 카트로닉스의 이명훈 차장은 “42V 체계는 잠시 정차할 때도 엔진이 정지되고, 가속시 혹은 오르막길에서 모터를 이용해 엔진출력을 지원함으로써 연료와 매연을 줄이는 등의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의 최근 신입사원 연수에 참여한 570명 중 전기전자 공학 전공자는 모두 80명. 아직 기계공학 전공자 290명보다 열세지만 계열사 현대모비스가 전기전자 관련 연구를 전담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다.
▽컴퓨터가 운전한다〓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동차 내 전장품은 오디오와 전자식 연료분사 장치 등이 고작이었다. 현재는 잠김방지제동장치(ABS)와 에어백이 웬만한 중형차에 장착되고 있고 고급대형차엔 자동항법장치가 속속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자동차는 이 수준을 넘어선다. 현대모비스 카트로닉스연구소의 연구과제를 보자. 무선 인터넷 통신을 이용한 텔레매틱스 시스템, 지능형 에어백과 무인 자동차 시대를 여는 첨단 차량시스템(AVS) 등 온통 첨단 전자 정보 시스템들이다.
에쿠스 등 고급 승용차에 쓰이는 ‘차량자세 안정화장치’는 ABS보다 두 단계 나아간 첨단 장치. 8개의 센서를 한 개의 칩이 통제하며 고속으로 코너를 돌아도 차량이 쏠리지 않는다. 고급 승용차에 내장된 스마트 에어백은 사고 종류별로 자동차가 알아서 8개의 에어백 중 어느 것이 터져야 할 것인지와 에어백이 터지는 속도 및 각도를 스스로 조절한다.
현대자동차는 최근 독일의 지멘스와 기술협력 계약을 체결하고 기존 차량 내 수십개 전선을 단 2개의 광섬유로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자동차 내에도 광통신이 깔리는 것이다.
▽텔레매틱스에 사활 건다〓통신(Telecommunication)과 정보과학(Informatics)을 합친 용어. 자동차와 컴퓨터, 이동통신 기술의 결합을 의미한다. 비상구난 차량항법 교통정보·오락·무선데이터 통신 등의 기능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목표.
이 기술이 실용화되면 사고가 나 운전자가 정신을 잃어도 자동차가 알아서 콜센터에 사고 위치와 사고 부위를 알려준다. 자가진단 기능을 통해 차의 어느 부위가 고장났는지도 알려준다.
최근 현대차 사내벤처팀은 중대한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자동적으로 사고 당시 운행상태를 저장하는 블랙박스를 개발했다. 블랙박스 정보는 콜센터를 통해 자동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의료진이 신속히 달려올 수 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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