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가득 음계처럼 경쾌하게 떠다니는 짧은 점선의 붓터치, 그 뒤로 배경이 되어 흐르는 유현(幽玄)한 먹의 농담, 하나 둘 피어나는 정겨운 물길과 넉넉한 야산, 그리고 무심히 길을 걷는 촌부 한두 명….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1897∼1972)의 산수화를 보면 내가 점이 되고 산과 물이 되고 끝내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청전의 붓은 그 자체로 자연이고 평화로운 삶이었다.
한국의 서정적인 산수와 향토적인 삶을 그렸던 한국 근대산수화의 최고봉 청전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그의 30주기를 기념해 6일부터 10월6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기획전 ‘청전 이상범의 진경산수’가 열린다. 동아일보사 후원.
청전의 1950∼60년대작을 중심으로 50여점이 선보인다. 1940년대에 그린 금강산 12경 연작과 ‘전(前)적벽부’ ‘후(後)적벽부’, 1950년대의 ‘춘경’ ‘하경’ ‘추경’ ‘설경’ 등 4계절 그림과 ‘고성모추(高城暮秋)’, 그리고 청전 산수화의 절창이라 할 수 있는 1960년대의 ‘우후귀려(雨後歸旅)’ ‘산가청류(山家淸流)’ ‘고원무림(高原霧林)’ 등. 처음 공개되는 작품도 30여점에 이른다.
18세 때인 1914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청전은 1930년대 들어 현실 풍경을 담아내는 사실적 수묵화를 시도했다. 그의 그림은 40년대 들어 변해갔다. 짧은 점선을 툭툭 끊어치는 특유의 필법을 구사하면서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50년대엔 그 점선과 그윽한 먹의 농담에 힘입어 실경은 그윽한 아름다움을 얻어갔고 더불어 청전의 정신도 깊이를 더해갔다. 그의 수묵 산수화는 60년대에 절정에 올라 무수한 명작을 쏟아냈다.
50년대 이후 청전 산수화는 우리의 산천을 그린 그림이되 어느 구체적인 공간을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실경이지만 실경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도 아니다. 우리 눈에 익숙한 우리의 산천이다. 미술평론가인 유홍준 명지대교수는 이를 두고 “우리의 기억 어딘가에 있는 미지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의 그림이 여전히 살아서 감동을 주는 것은 실경이되 실경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작에서도 드러나듯 청전의 산수화는 정갈하다. 짧게 끊어치는 붓의 터치는 거친 듯하고 때로 붓 끝으로 튀어오르는 파편같은 먹물은 대담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한 폭의 산수는 놀랍게도 조용하고 담백하다. 화면에 깔린 은은한 먹의 농담은 새벽 안개처럼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전은 기법과 정신 면에서 20세기 한국의 산수화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4일 오전11시에는 유홍준 교수가 ‘청전의 진경산수’를 주제로 강연한다. 02-734-6111∼3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청전 산수화 왜 ‘가짜’ 많을까▼
시중에 나도는 청전 이상범 그림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하다.
청전 그림은 왜 가짜가 많을까. 첫째는 돈이 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모사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모사하는 사람들에겐 세밀하고 정교한 선보다는 청전의 툭툭 끊어치는 짧은 점선이 상대적으로 모사하기가 쉽다. 물론 제대로 흉내내려면 쉽지 않지만 고도의 테크닉을 지닌 가짜 전문가들에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무수한 훈련을 통해 끊어치는 붓터치를 익히면 아마추어의 감식안 정도는 손쉽게 속아넘길 수 있다. 정교한 선과 달리 끊어치는 점선은 비전문가들에겐 엇비슷해 보인다.
청전이 배접한 한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점도 위조범에게 가짜의 빌미를 제공한다. 보통 작가들과 달리 청전은 배접을 먼저한 뒤 한지 위에 한지에 그림을 그렸다. 먹은 한지를 뚫고 배접지에도 스며든다. 위조범들이 한지와 배접지를 분리해 두 작품으로 만들어 거래하기도 한다.
사진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모사하는 경우도 있다. 청전의 손녀인 미술사학자 이승은씨는 “가짜 그림 사건 때 확인해보니 할아버지 작품을 실물 크기로 정확하게 촬영한 뒤 그 위에 한지를 올려 놓고 하나하나 그대로 모사한 것을 봤다”고 말했다.
▼청전은 누구인가▼
1936년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식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실었다. 당시 일장기를 지운 사람이 바로 청전 이상범이었다.
청전은 1927년 동아일보 학예부 미술기자로 입사해 소설 삽화를 담당했다. 일장기를 지운 당시 상황에 대해 청전은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2층 편집실에서 사환 아이가 한 장의 사진을 들고 왔다. 이어 체육부 이길용 기자가 구내전화로 나를 불렀다. 사진의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좋다고 대답했다. 의자에 앉아 붓을 들어 일장기 위에 흰 물감을 칠했다. 그런 다음 종이에 싸서 동판부에 보냈다…그날 저녁 술을 먹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집사람이 ‘사환 아이가 오는 대로 신문사에 들리라고 했다’고 전했다…편집국 안으로 들어가니 기자들의 얼굴이 새하얗다. 경찰들이 신문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경기도 경찰부로 연행됐다.”
40일동안 구속됐던 청전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언론기관에 관여치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 청전은 그렇게 동아일보를 떠나야했다. 그러나 청전은 “동아일보 기자 시절이 내 젊음의 핵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막내아들 건걸(상명대명예교수·한국화가)씨는 “가택수색을 당하고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끝까지 일장기 말소는 혼자 했다고 주장하셨다”고 전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