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창]황경식/노블레스 오블리주

  • 입력 2002년 9월 13일 18시 28분


언젠가 친한 선배 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 중 감옥에 들어있는 사람은 기결수이고 거리에 다니는 사람은 모두가 미결수다.” 그 당시는 선배의 냉소섞인 이 말을 단지 유머로만 받아들이며 웃어 넘겼으나 요즘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그 말이 다시 명언처럼 실감나게 다가오곤 한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대로 신임도 받고 능력도 인정받는, 그야말로 괜찮은 사람이 장관이나 총리 등 고위직에 지명받는 법인데, 일단 인사청문을 위한 검색대에 올라 전모를 들추게 되면 위법이나 탈법의 흔적이 곳곳에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장관이나 총리 물망에 오를 만한 사람들, 그래서 청와대에서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이제는 이 같은 검색과 더불어 후환이 두려워 지명되는 것 자체를 재고하기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 되었다.

▼공직자 도덕성 문제삼는 까닭▼

청문의 검색대에 비친 우리의 준법문화는 그야말로 낙제점수가 아닐 수 없다. 대충 세태에 따라 살다보면 어느 것이 준법이고, 어떤 것이 위법이며 탈법인지조차 애매할 때가 많다. 이처럼 위법이나 탈법이 일상화되어 있는 법규범 환경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조차 판단하기가 어렵다. 법대로 살려고 애쓰다 보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고, 고지식하다느니 인간미가 없다느니 하며 주위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일쑤다.

제법 모범적인 시민으로서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도 일단 검색이 시작되면 서너가지 이상의 위법이나 탈법이 발각되게 마련이고,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강변하는 모습으로 이미 편법에 중독된 사람임을 자신도 모르게 폭로하는 셈이 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평소 얼마나 주변을 챙기지 못했고 정돈하지 않고 살아왔는지 자각하고 스스로 놀라게 된다. 준법, 위법, 탈법의 경계가 헷갈리는 준법 환경에서 우리의 준법의식은 더욱 둔감해지고 편법에 중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냥 보통사람에 머물지 않고 공직의 후보가 되기를 욕심내는 자라면 준법의식이 어느 수준에 있어야 할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어느 정도의 탈법과 위법이 있더라도 그의 능력과 자질을 생각해서 관용을 베푸는 것이 옳을까. 하지만 적어도 공직을 희망하는 자라면 공적 마인드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평범한 보통시민 이상의 준법의식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어야 한다고 본다. 편법에 물든 사람이 현실의 편법 관행을 개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공직자의 도덕성이나 사생활을 특히 문제삼는 까닭은 그 같은 성품이 단지 사생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공직을 수행하는 과정에까지 인과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생활에서 위법, 탈법, 편법에 길들여져 시비 선악의 분간에 무감각한 자라면 더 큰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무엇으로 보장할 것이며 더 큰 유혹과 로비를 거절할 도덕적 용기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더욱이 그러한 범행이 권력의 밀실에서 이루어져 상당한 정도로 비밀보장이 이루어진다고 상상해보라.

그리스의 기게스라는 사람은 원래 양을 치는 목동이었으나 남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끔 투명인간으로 변화시키는 요술반지를 얻고부터는 갖가지 범행에 맛을 들이고, 드디어는 왕비를 겁탈하고 정권까지 찬탈하는 부정의를 저지르게 된다. 우리의 고민은 과연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서도 그대로 의인으로 남아날 자가 몇이나 되며, 과연 누구이겠는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부패 탈법 막을 제도적 장치를▼

결국 우리는 부정, 부패, 탈법, 위법을 용납하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확립하고 그 투명도를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직자가 기게스의 반지로 국민을 농락하지 못 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법적, 제도적 장치만으로 정의로운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서도 안될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법과 제도도 구멍은 있게 마련이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법과 제도의 그물망으로 포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통령과 총리와 장관을 위시한 공직자들이 보통시민보다 그 자질이나 도덕성에 있어 더 탁월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보통시민들은 그를 믿고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귀족은 귀족의 자질과 귀족의 의무를 행할 수 있는, 즉 귀족다운 자질을 갖춘 자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귀족에게는 귀족의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황경식 서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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