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특집]은행들 PB영업 ‘귀족 마케팅’ 강화

  • 입력 2002년 9월 23일 15시 50분



【대치동 분당 등 이른바 ‘부자 동네’에 호텔 같은 은행이 들어서고 있다. 기존에 일반 영업점의 한쪽에 VIP코너를 두던 은행들이 아예 VIP를 전담하는 별도 점포를 마련하고 ‘종합 자산관리’와 ‘라이프 케어’를 한다고 나섰다. 외국계 은행과 국내은행 중 비교적 일찍 시작한 하나은행에 이어 우리은행이 지난해 말 1호점을 시작으로 3개의 PB점포를 운영 중이고, 한미은행도 올해 4월 서울에 첫 점포를 연 데 이어 최근 부산에 2호점을 냈다. 신한은행과 조흥은행도 이달 초 전용 점포를 열었으며 국민은행은 다음달 중 선보일 예정이다.】

큰 자산을 굴리는데 관련되는 ‘온갖’ 일을 상담·대행하고, ‘귀족’들의 집사나 비서처럼 여행 예약, 미술관 관람, 건강 검진, 자녀 유학상담까지 해결해 준다.

고화질 벽걸이TV, 고급 마감재, 푹신한 소파를 기본으로 갖춘 점포에, 세무 부동산 의학 뱅킹 증권투자 등의 자격증을 서너개씩 가진 전문가들로 진용을 갖췄다.

1억원을 넣어두면 VIP로 분류했던 기준도 은행별로 3억원, 10억원 등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그들만을 위한 프라이빗 뱅킹, 당신께는 죄송합니다〓조흥은행이 PB센터를 열면서 내보낸 다소 ‘도발적인’ 광고 카피다. ‘죄송하지만’ PB전용 센터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은행 영업점은 건물의 1층에 많다. 눈에 잘 띄어야 사람들이 오가며 들를 수 있기 때문. 그러나 PB전용 점포는 가능한 한 높은 곳에 숨어있다.

한미은행 로열프라자는 7층에, 신한은행 PB센터는 25층에 있어 마치 스카이라운지 같다. 언뜻 봐서는 은행인 줄 알 수 없도록 간판의 로고 디자인도 다르다. 우리은행 프레스티지 클럽에는 지문인식 장치가 있으며, 신한은행은 예치금 10억원 이상인 고객에게만 PB센터 이용카드를 발급했다.

‘그들’의 문턱도 점점 높아진다. 신한은행 PB센터 고객은 약 500명. 1억원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16만5500명이다. 우리은행도 최근 고객 기준을 상향 조정했다.

▽‘그들’을 찾아내기〓부자 고객 마케팅에 정성을 쏟는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 시중은행에서 상위 약8% 고객의 수신액은 전체의 70%에 육박하고 수익 기여도도 60%가량 된다.

반면 하위 50%는 고객 유지비용을 감안하면 ‘본전’이 안 나오는 고객이다.

하나은행의 김성엽 PB팀장은 “1억원을 넣으면 우선 관심을 기울이는 고객이 된다”며 “통상 하나은행에 10억원을 넣는 고객은 다른 금융기관에 50억원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1억원을 시험삼아 넣어보고 차후에 수십억원을 가져오는 고객도 있고, 1억원 고객이 어느날 상속을 받아 300억원 고객이 되기도 한다.

‘잠재 알부자’를 찾아내고, 다른 금융기관에 넣은 자산을 이쪽으로 좀 더 가져오도록 만드는 일은 오랜 ‘작업’이 필요하다.

한미은행 로열프라자의 이성룡 지점장은 “PB도 고객으로부터 테스트를 당한다”고 말한다. 수백억원대의 거대 자산가는 PB의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저 빌딩을 사려고 하는데 적정가격은 얼마냐”는 등의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판단되는 신규고객은 4월 이후 약 80명. 현재 ‘작업 중’인 고객은 약 500명이다.

‘작업’을 하려면 만나는 계기를 많이 마련해야 한다. 최근 로열프라자는 갤러리아 백화점의 명품 패션쇼에 50자리를 확보했다. 초청장은 거래 고객 중 단지 15명에게만 보냈다. 나머지 35자리는 그 고객들이 데려올 친구나 친지 몫이다. 부자들은 ‘끼리끼리’ 모이므로 이들이 미래 고객으로 공략 대상이 되는 것. 연락처 등을 받아오는 성공률은 10% 정도다.

▼“서비스보다 자산관리 능력보고 평가해야”▼

▽‘그들’은 왕이로소이다?〓물론 PB센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산 관리’다. 고객 자산의 포트폴리오를 점검해주고, 고객의 투자성향에 맞게 예금 주식 채권 부동산 보험 등에 적절히 투자하도록 설계해준다.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상속을 할지, 세금은 어떻게 내야 하는지 등도 거액 자산가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이런 서비스 외에 최근 각 은행들은 리무진 서비스, 백화점 발레파킹, 여행예약, 자녀 맞선, 갤러리 투어 등의 부대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제공한다.

PB의 스카우트 비용, 점포의 인테리어 비용, 자산관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부대 서비스 비용 등을 지나치게 써가며 은행들이 PB시장에 거품을 일으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왕’ 대접도 좋지만, 실제 자산관리는 몇 가지 은행 상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면서 호화서비스 경쟁만 과열됐다는 것.

스위스의 픽텟앤씨 은행은 소개 문구에서 “1805년 설립된 이래 나폴레옹 전쟁, 양대 세계대전, 대공황 등 재난을 겪으면서도 고객의 재산 만큼은 철저히 지켜왔다”는 자부심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PB는 아직 자산관리 능력이 세계 수준에 많이 못 미친다”며 “부대 서비스 경쟁보다는 자산관리 역량을 차별화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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