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설정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설정과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뽑아져 나온 ‘스토리’가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는 것은 재미있는 스토리 때문이지 감탄할 만한 설정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스토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콘텐츠 비즈니스의 핵심은 스토리 개발이라는 생각이 퍼지고 있는 것 같다. 한때는 디자인 비즈니스라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캐릭터 비즈니스도, 이제는 캐릭터의 디자인보다는 캐릭터의 배경에 깔려 있는 스토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우리나라 영화판을 보면 스토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에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느낀다. 올해 초 이른바 ‘3대 재앙’이라 불리며 흥행에 실패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3편이 모두 스토리가 파산상태 일보직전이었기 때문.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거나, 개연성이 없거나, 비약을 거듭해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스토리를 보면 사람들은 삼류라고 혹평한다. 하지만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하게 잘 짜인 스토리라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더욱 중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미야자키 브랜드의 애니메이션은 스토리가 재미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대중문화평론가 가라사와 준이치(唐澤俊一)는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분석한 뒤 무척 재미있는 말을 했다. ‘스토리의 정합성을 버릴 때, 그때부터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가라사와는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의 스토리가 허점투성이라고 말한다. 물론 한 번 보았을 때는 잘 모른다. 다섯 번 정도 머리를 굴려가며 꼼꼼히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은 미야자키 감독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스토리를 무척 잘 썼다는 평가를 받은 ‘식스 센스’ ‘번지점프를 하다’ ‘쉬리’ 등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스토리 중에 앞뒤가 안 맞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허점을 감독들이 모를 리는 없다. 재미를 위해 스토리의 정확성을 희생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의 심리나 동기를 부각시키거나 멋있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면 정합성 정도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 같다. 스토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재미이기 때문이다. 단, 처음 볼 때는 그 허점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에 그쳐야겠지만.
김지룡 문화평론가 dragonki@choi.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