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가을은 잔인한 계절

  • 입력 2002년 10월 3일 18시 01분


미국에서 유학 중인 20대 후반의 친구(♀)로부터 e메일이 왔다. 그녀는 3년 동안 창조적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직장에 다니다 홀연히 사표를 던지고 지난해 미국으로 떠났다.

국내에서 직장을 다닐 당시 그녀는 패션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가방과 구두를 브랜드별로 장만했다. 서울 이태원의 보세집을 구석구석 뒤져 ‘에버크롬비(Abercrombie)’ 트레이닝 바지를 싼값에 사는 경제감각도 발휘했다. 다만 너무 두루두루 성격이 좋아 단 한 사람의 ‘애인’을 만들지 못하는 게 흠이랄까.

가을을 맞아 그녀가 들려주는 싱글 여자들의 요즘 패션과 젠더 이야기를 소개한다.

친구야, 안녕.

우선 내가 좋아하는 패션 이야기.

유학생 신분이라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비싼 명품은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얼마 전 뉴욕타임스를 읽으니까 최근 세계 경기가 불황이다 보니 패션도 이것저것 명품으로 치장하기보다 필요한 것 하나를 아주 비싸고 튀는 것으로 장만하는 추세라고 하더라.

예전에는 ‘프라다’나 ‘페라가모’처럼 점잖고 기본적인 스타일을 선호했는데, 요즘은 ‘펜디’나 ‘크리스티앙 디오르’처럼 여성스러운 스타일이 예뻐 보인다. 터키석 같은 자연석 액세서리도 유행이지.

특히 내가 최근 푹 빠져 있는 구두 브랜드는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과 ‘지미추(Jimmy Choo)’. ‘프라다’보다 한 단계 더 비싸지만 섹시하고 독특한 디자인이 많다. 미국 뉴요커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TV 인기 시트콤 ‘섹스 앤드 시티’의 주인공 사라 제시카 파커도 드라마 속에서 자주 신고 나오지. 그 드라마는 매일 예쁜 옷을 입고 팬시한 식당에서 식사하는 전문직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것 같아.

요즘 이곳에선 매치닷컴(www.match.com)이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에 자신이 원하는 파트너의 조건을 입력하면 조건에 맞는 전세계 남성들의 프로필이 사진과 함께 소개돼. 흡연과 음주 여부, 종교, 수입도 상세히 설명돼 있어. 심리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이혼남부터 박사학위의 여피까지 다양해.

절친한 친구 3명이 이 사이트를 통해 만난 남자들과 사귀고 있어. 바를 전전하며(Bar Hopping) 술 마시며 엮이는 남녀관계에 싫증을 느낀 남녀들이 이곳을 통해 진지한 대화와 만남을 찾는 거지. 얼마 전 미국인 친구(♀)와 대화하며 내린 결론은 남녀 사이에 서로 오가는 e메일 양이 여름엔 줄었다가 가을에 급격히 늘어난다는 것. 남자와 여자는 가을이면 사랑에 더 굶주리는 걸까.

30대 전후 싱글 여자들의 고민은 뭐니뭐니 해도 ‘진정 용감해 질 수 있는가’일 것 같다. 한국에서야 결혼 전 성관계가 아직도 드러내놓기 꺼려지는 문제지만 여기서야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결혼 전 누구랑 잤느냐는 전혀 이슈가 안 되니까.

클래스메이트 중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란 별명을 가진 중국인(♀)이 있어. 까만색 긴 생머리와 까만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30대 동양 여성이지. 그 친구가 7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영화배우 휴 그랜트를 만났대. 그와 우연히 대화를 시작했고, 데이트까지 하게 됐다는 거야. 그 친구와 휴 그랜트는 6번 데이트하고 결국 헤어졌다지. 휴 그랜트가 “여자친구가 휴가갔다가 돌아온다”는 이유로 작별을 선언한 거야.

놀라운 것은 중국인 친구가 휴 그랜트와의 두번째 데이트에서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다”고. 우린 그녀처럼 자기를 던져서 용감해질 수 있을까. 평생에 한번쯤은 그런 용기를 부려봐야겠다고 친구들끼리 모여 결의했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의 고민은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접근하면 남자가 달아날까’이니까.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하는 여자야말로 진정한 ‘연애 프로’라 할 수 있지.

태국인 친구(♀)는 또 이런 주장을 폈어. ‘여자는 자신을 울게 만든 남자를 평생 사랑하고, 남자는 자신을 울게 만든 여자를 평생 기억한다’고. 자신을 울게 만든 여자를 기억하는 남자는 과연 그 여자를 사랑해서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울었다는 것이 억울해 잊을 수 없는 걸까.

내가 친구들과 호숫가에서 또는 노천카페에서 고민하는 연애문제는 아주 소소한 심리적인 것들이고, 또 정답이 보이지 않아 늘 어렵다.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이런 종류의 고민을 나눌까.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고? 천만에. 싱글 여자에게 가을은 잔인하고도 뒤숭숭한 계절이다.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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