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

  • 입력 2002년 10월 11일 17시 47분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이태진 지음/502쪽 2만2000원 태학사

유교 혹은 주자학이라고 하면 봉건적인 것, 전근대적인 것이라는 발상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한국사람에게 유교 망국론(亡國論)이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교 평가는 근대에 들어와서 서구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고 유교로 상징되는 구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담론이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어느 새 상식화되어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전통시대는 서구문화·서구의 역사보다 먼 것으로 느껴지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태진 교수(서울대·국사학)의 새 저서는 정말로 시의적절한 기획이다.

한 때 학계에서 말이 많았던 소위 유교자본주의론은 아시아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거품처럼 사라졌는데 그만큼 학문적 실속이 없는 자의적인 논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최근 사상사 연구의 일각에서는 유교 또는 주자학에 대한 재평가의 움직임도 있지만 충분한 설득력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사회사적인 관점에서 주자학이 가지는 국가건설, 사회건설 모델의 역할에 주목함으로써 사상과 경제사회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려 했고 그 결과 종전의 유교 평가와는 다른 독창적인 견지를 개척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쳐서 향약(鄕藥) 개발을 중심으로 한 한방(韓方) 의술의 발달, 그에 의한 인구증가가 새로운 농업기술인 중국 강남농법(江南農法)의 수용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 저자의 전체적 구도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변화에서 국가와 주자학자들의 지도적 역할이 아주 컸다는 점도 역설돼 있다.

저자의 논의 전개는 치밀하며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고려후기의 인구증가를 실증하기 위해 묘지명(墓誌銘)에 착안한 것이 그 상징적인 예이다. 흔한 자료들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기법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역사학자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유교 망국론의 입장에서 부정적 평가가 일반적이었던 기존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한국의 전통을 대부분 부정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대한 재평가가 매우 구체적인 실증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본사와의 비교문제에 대해서다. 일본에서는 조선시대와 같은 유교국가체제는 한번도 성립되지 않았다. 그 최대 원인은 10세기 이후 한반도나 중국대륙과의 교류가 그 전과 같이 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사 연구에서는 이런 사태를 두고 ‘국풍(國風) 문화’의 성숙이라고 높이 평가하는가 하면 유교국가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빨리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14∼18세기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비교할 때 이런 견해는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근대 이후의 일본을 파악할 때도 일본이 유교를 체제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던 것을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평가해도 되는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사뿐만이 아니라 중국사나 일본사 연구자에게도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견해에 대한 의문점으로서 19세기 조선왕조에 관한 평가 문제를 지적해 두고 싶다. 저자는 19세기 후반의 새로운 세계 정세에 대해 왕조가 조선초기와 같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했다고 평가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이 점은 찬성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유교국가는 몇 가지 본질적인 면에서 근대에 대응하기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교국가는 무엇보다도 작은 국가(cheap government)를 이상으로 삼음으로써 관료수가 적은 만큼 재정규모도 대단히 작은 편이었다. 그런 체제는 종전에는 훌륭한 체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주 불리한 조건이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교국가로서의 체제원리 자체를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한국사 miyajima@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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