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케르테스 노벨상 수상으로 본 수용소의 문학과 영화

  • 입력 2002년 10월 11일 18시 09분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 그는 “새로운 소설에 착수할 때마다 항상 아우슈비츠를 떠올린다”고 밝혔다. 케르테스의 수상을 계기로 ‘수용소 문제’를 테마로 다룬 문학 작품과 영화에 대해 살펴봤다.》

강제수용소를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작업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전대미문의 반인륜적 현상을 극복하려는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노력이 그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어 왔다. 2차대전 종전 후 수용소로부터 귀환한 사람들이 체험담의 형태로 자신들의 가공스러운 경험을 전달하고자 애쓴 데 비해, 오늘날에는 생존자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진실의 전달’보다 ‘예술적 승화’에 더 주력하고 있는 점이 차이일 따름이다.

하지만 “대량학살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윤리적으로 온당한가?”, “3000명이 동시에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라는 질문들은 예술적 형상화에 대한 시도를 좌절시키고 있다. “생존자들만이 쇼아(유대인 대학살)를 이야기할 수 있고, 그 기억은 전달 불가능하다”고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은 부르짖고 있다. 물론 이 표현 속에는 피해자만이 수용소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명분이 들어있지만, 유대 중심적인 뉘앙스가 짙게 배여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유대인 학살은 오로지 유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역사를 뛰어넘는 현상인가? 유대인 학살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공스러운 사건이었고 20세기의 모든 갈등이 반유대주의 속에 집약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이후 아직도 예술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 찾기는 “예술이 진정 구원의 한 수단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서구의 모든 동시대 예술가들 앞에 던져진 화두임에 틀림없다.

수용소 문제에 대한 예술 쪽의 접근 방식은 아주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의 경우 엘리 위젤이나 임레 케르테스 같은 작가들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눈을 통해본 수용소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반면, 다비드 루쎄 같은 프랑스 작가는 수용소 안에서 전개되던 정치범들과 잡범들 사이의 무자비한 권력 투쟁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또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나 프랑스 작가 로베르 앙텔므는 수용소 속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수없이 반문한다. 레비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회색지대’라는 개념에 빗대기도 한다.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조형물

직접 수용소를 체험하지 않은 작가들은 수용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대신 ‘우회적’인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로맹 가리는 ‘징기스 콘의 춤’이란 작품을 통하여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 혼령이 독일인 경찰서장에 들러붙은 관계를 설정한다. 앙드레 슈바르츠-바르는 유대인 학살에 관련된 한 가족의 역사를 다루면서 학살의 기원을 바빌론 시대부터의 유대인 박해와 연관짓기도 한다. 체험담을 다룬 작품의 경우, 최근 작품보다 체험의 강도가 더 강렬한 초창기 작품들이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허구문학은 점점 다채로워지고 있다.

영화는 문학에 비해 수용소를 미학적으로 다루는데 더 적극적이다. 대표적 영화들로는 ‘밤과 안개’(프랑스·알렝 레네 감독), ‘홀로코스트’(미국·마빈 촘스키), ‘쇼아’(프랑스·클로드 란츠만), ‘닥터 코르작’(폴란드·안제이 바이다) ‘뉴렌베르크에서 뉴렌베르크까지’(프레데릭 로시프), ‘쉰들러 리스트’(미국·스티븐 스필버그), ‘인생은 아름다워’(이탈리아·로베르토 베니니),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등이 있다.

영화를 통한 접근 역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된다. 따라서 각 영화가 발표될 때마다 현실의 재현과 윤리적 문제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는 전 세계에 배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흥미를 유발시킬 다양한 요소들을 집약시켰다. 하지만 당시 역사를 미화 혹은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판받았다.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최대한 리얼리티를 보여주려고 애썼지만 가스실에서 독가스 대신 샤워용 물이 나오는 극적인 장면을 ‘무리하게’ 동원했다.

‘쇼아’는 방대한 스케일로 당시 학살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지만, 철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통해 일방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 오히려 문제적이다. ‘인생은 아름다워’ 속에서는 유태인 구출을 위해 애쓰는 쉰들러의 모습이 총부리 앞에서도 장난스럽게 걸어가는 귀도의 희화(戱畵)적 페이소스에 의해 대치된다. 그러나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적은 편이다. 사실의 직접적 재현보다 알레고리를 동원하면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대체로’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허구에 대한 거부반응이 심한 유럽에서는 다큐멘터리 작품들이 더 대접받는 형편이다.

어쩌면 임레 케르테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하나의 색다른 사건으로 우리에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서구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없다면 유럽에 대한 이해가 영원히 절름발이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상빈 한국외대 불어과 강사·EU연구소 연구원·프랑스 파리 8대학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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