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진주목걸이에 그럴듯한 눈매로 렌즈를 쏘아보는 코코의 모습을 바라본다. 깡마른 체구에 짧은 머리, 여자들을 빡빡한 코르셋과 치마에서 해방시킨 진정한 페미니스트로서의 그녀는 참 오랫동안 유럽 이곳저곳을 옮겨다녔다.
장돌뱅이 알베르 샤넬이 고아원에 버린 세 딸 중 둘째 가브리엘 샤넬(1883∼1971). 훗날 전 세계인이 ‘코코 샤넬’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프랑스의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다.
고아원에서 자라 보조 재봉사로 처음 ‘패션’과 만나게 된 그녀는 한때 ‘코코리코(Ko Ko Ri Ko)’라는 노래를 불러 코코라는 애칭을 얻었다.
파리의 캉봉 거리 21번지(나중에 31번지로 옮겼다) 2층에 있는 샤넬하우스를 비롯해 샤넬은 프랑스 전역에 상점을 열었다. 첫 번째 메종 샤넬은 도빌이었다.
고급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에 문을 열어 호화판인 노르망디 호텔, 카지노와 나란히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1차 대전의 발발로 가게는 문을 닫아야만 했다.
샤넬은 대서양 연안의 비아리츠에서 자신의 운명을 다시 시험해야 했다.》
●요오드 가득한 대서양의 미풍, 비아리츠
연인을 따라 휴가를 보내러 프랑스 서남단 해안도시 비아리츠에 도착한 샤넬. 전선에서 먼 휴양지들 중 하나였고 전쟁의 공포를 가장 잘 잊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엔 아무나 갈 수 없는 최고급 호텔들이 있었다. 지금도 영업 중인 미라마 호텔(Hotel Miramar)과 왕후가 내려와서 묵었다던 팔레호텔(Hotel Palais)은 당시 수십년에 걸쳐 단골로 묵는 스페인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어 빈 방이 없을 정도였다.
샤넬은 중립국 스페인과 가까워서 옷감이나 부속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이곳 비아리츠에서 또 다른 메종 샤넬을 열었다. 비아리츠의 가르데르 거리, 지금은 고급주택가로 바뀌었지만 넓은 안뜰이 딸린 ‘빌라 드 라랄드’라는 이름의 큰 별장이었다. 전쟁 중임에도 그녀의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어 인근 지방의 부르주아들, 대서양 연안의 휴양지에 와 있던 파리 부자들을 단골 고객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비아리츠는 정말 어떤 곳일까?
비아리츠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막힌 데 없이 탁 트인 바다와 등대, 그리고 싱그러운 바람이다. 대서양과 접해 있는 이 작은 도시엔 오래된 대리석 건물과 작은 성,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바닷가 마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바다와 함께 달리는 구불구불한 언덕길 아래는 최고급 호텔에서 중저가의 호텔까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고급 부티크와 해산물 레스토랑, 해양스포츠숍, 우체국, 관공서 등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붉은색 글씨가 어색한 중국집까지 거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리조트풍으로 편안하게 차려 입은 여행자들은 노천 카페에서 햇빛을 즐기고, 거리를 메우는 것은 모두 외지인과 고급스러운 컨버티블뿐이다. 특히 카지노 앞엔 성장을 한 사람들이 낮부터 밤까지 줄을 잇고, 최고급 호텔들은 화려한 밤 행사를 위해 불을 밝힌다. 아무리 작은 호텔이라 해도 역사가 최소한 100년은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 바다는 물론, 힘찬 파도를 가르는 서퍼들의 차지이고 만을 따라 돌아가는 한구석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토플리스 차림으로 해안을 메우는 사람들로 시선 둘 곳이 없을 정도다. 풍요롭고 낙천적인 느낌. 그래서 더욱 화려하고 자극적인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꿈틀댄다. 카지노와 고급스러운 호텔, 그리고 메종 샤넬과 같은 명품 부티크들이 비아리츠에 있을 수 있는 이유다.
●샤넬의 쉼터, 로잔과 생 모리츠
1939년 9월, 샤넬은 프랑스 전역의 메종 샤넬 문을 닫고 아주 긴 휴식에 들어갔다. 전쟁이나 노조의 파업, 무기력, 연인의 죽음 등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그녀가 휴식처로 작정한 곳은 스위스였다. 그녀 나이 예순두살. 특히 레만호가 있는 로잔을 좋아해 그곳 보리바주 호텔에 가장 오래 묵었다. 겨울에는 알프스의 스키휴양지 생 모리츠에서 몇주를 보내곤 했다.
로잔에는 세계 명사들의 자녀가 다니는 국제적인 사립학교들이 많다. 관광의 기점이 되는 구 시가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불릴만큼 매혹적이다. 성당 밖으로 나오면 바로 앞 테라스에서 한눈에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다. 멀리 알프스 산자락이 흘러내린 곳에 레만호가 보이고 오래된 건축물들이 차근차근 시선을 메운다. 구 시가지는 대부분의 길들이 급경사이고 자갈길이지만 골목마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상점들과 간판, 분수 등이 정감있다.
생 모리츠는 스위스 동부 다뉴브강의 지류인 인(Inn)강 유역, 일명 엥가딘 계곡에 있는 스키 휴양지다. 동계 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한 겨울 스포츠의 메카지만 그보다는 영화 ‘007’에서 잘 생긴 스파이가 매력적인 여인과 만나는 곳으로 더 잘 기억된다. 체르마트가 힙합 스타일 스키복의 스키촌이라면 생 모리츠는 밍크, 담비코트 스키복 차림의 고급 리조트다.
생 모리츠 중심 도로 양편에는 내로라하는 브랜드의 명품 숍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매년 송년회를 연다는 팔레스, 쿰 등 최고급 호텔들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해마다 생모리츠 전역에서 열리는 올드카 랠리와 승마, 폴로, 그레이 하운드 경주 등은 이곳을 찾는 점잖은 유럽 귀족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스키를 타지는 않았지만 샤넬은 생 모리츠의 맑은 공기를 사랑했다.
샤넬은 로잔과 생 모리츠에서 재충전의 기운을 얻었다. 일흔한살 생일을 맞은 1953년 다시 ‘메종 샤넬’의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2월, 그녀는 130점의 신작을 선보이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유럽문화에 굶주려 있던 미국인들이 재빨리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이해했고 샤넬에게 ‘부와 명예’를 되돌려 주었다.
이 여행의 출발점은 프랑스 작가 앙리 지델의 전기 ‘코코 샤넬’을 읽은 흥분이었다. 샤넬이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또 다른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여행의 매력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아는 ‘누군가’의 느낌을 시간을 달리해 공유하는 즐거움….
이정현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가는 길▽
●비아리츠
프랑스 파리의 오를리 공항에서 비아리츠 공항(약 1시간10분 소요)까지 국내선이 마련돼 있다. 기차로는 국립철도인 SNCF를 이용,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테제베(TGV)로 출발 가능하다.
자세한 정보는 프랑스 관광성(02-776-9142, franceguide.or.kr/www.biarritz.fr)
● 로잔과 생 모리츠
로잔은 레만호 북쪽 연안의 중심부에 있으며 제네바와 베른, 취리히를 연결하여 TGV로 파리까지 이어지는 교통 중심지다. 제네바부터 로잔까지는 기차로 40분, 베른에서 로잔은 2시간10분 정도가 걸린다.
생 모리츠는 취리히에서 기차로 3시간25분, 루체른과 인터라켄에서는 각각 4시간, 5시간50분이 걸린다.
기타 정보는 스위스 관광청(02-739-0034, myswitzer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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