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진단할 때 가장 널리 쓰인 말은 ‘사회갈등’ ‘권위붕괴’ ‘신뢰상실’ ‘총체적 위기’ 등이었다. 정치지도자들은 온갖 ‘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 ‘제2건국’ 등을 기치로 내세워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위기가 가중되었다. 위기의 근원은 그냥 둔 채 표피적 문제만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모범'은 커녕 위기만 키워▼
그렇다면 한국사회 위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회’란 나약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한 개인들의 집합체다. 사회를 유지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일정한 가치에 합의하고,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질서를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도덕이고 규범이며 법이다.
사회가 위기를 맞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성원들이 사회적 가치와 규범에 혼란을 느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질서가 변하는 환경에 부응하지 못할 때이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이 두 가지가 중첩되어 나타난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의 와중에서 가치관과 규범은 혼란스럽고 적합성을 잃어 가는데, 급변하는 환경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는 창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와 규범은 어떻게 창출되고 확산하는가. 그것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엘리트들의 역할이다. 이때 엘리트란 반드시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들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이나 경영자 등 사회 각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총칭한다. 한 시대의 가치와 규범은 실로 엘리트 집단의 인식과 태도에 따라 창출되며, 그들의 행동과 수범에 따라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정치 영역이 과도하게 비대해져 정치엘리트 집단이 사회질서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국민에게 무엇을 보였던가. 쿠데타, 권력형 축재, 보스 중심의 파당정치, 술수와 말 바꾸기,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 등이다. ‘정치꾼’만 난무하고 ‘정치인’은 드물었다. 그렇다고 다른 영역에서 대중적 수범이 되거나 존경을 받는 엘리트 집단도 없다. 위기사회의 근원이 된 불법과 편법, 부정과 부패, 집단이기주의 등은 바로 엘리트 집단의 행태들이 아닌가. 그들만이 행할 때는 소수의 특권이었으나, 구성원 다수가 따라하니 사회적 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앞다투어 제시하는 ‘바른 나라’ ‘국민통합’ ‘사회개혁’ 등의 구호는 모두 위기사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을 보여준다. 과연 이들은 새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 줄 것인가. 대선 주자들은 불과 40여일 후의 결과에 골몰하지만, 국민은 더 나아가 20년 후의 한국사회를 걱정한다.
▼大選 캠프서 뭘 할건가▼
이른바 대선 캠프에는 수천명의 지식인과 정치, 경제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대선 기간은 물론 향후 나라의 새 질서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진정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올바른 정책을 개발하고 대중적 본을 보인다면 사회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대로 대선 후의 잿밥에만 관심을 보인다면 또 한번 고약한 모범이 될 것이다. 이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는 국민의 감시와 심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위기에서 새 질서가 창출되려면 대중적 수범을 보일 바람직한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정치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배규한 국민대 교수·사회학·객원논설위원 baeku@hotmail.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