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 첫 시집 ‘지독한 갈증’
파나마 독감이 진주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독감을 지독한 감기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것이더구나. 잔병치레가 유난한 우리 아우가 이 독감의 계절을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최근에 나온 시집들을 읽다가 독감에 대한 아주 새로운 성찰이 있어, 우리 아우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최종수 시인이 최근에 펴낸 첫 시집 ‘지독한 갈증’(문학과경계사)에 독감에 관한 시 두 편이 있다. 사제이자 투사이기도 한 시인은 놀랍게도 독감을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는다. 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고통을 누군가를 더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독감 2’라는 시에는 “독감은 그리움이다”라는 빛나는 선언까지 있구나.
시인에게 사랑은 투쟁이다.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정권을 비판하는가 하면, 자본주의와 미국의 횡포 앞에서 분노하기도 한다.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 현장에서 시를 읊는가 하면, 미군 부대 앞에서 손을 높이 치켜들고, 새만금 갯벌에서 인간의 무지막지한 욕망을 꾸짖는다. 이쯤에서 아우는 최종수 시인을 ‘불온한 사제’라고 명명하며 뒤돌아설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아우도 환경 운동에 몸담고 있으니 잘 알 테지만, 진정한 투사, 진정한 종교인은 정말 여린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양심과 신념은 모발습도계보다 예민한 감수성에서 나온다. 나는 완력만 믿는 투사나 둔감한 종교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투사와 종교인, 그리고 시인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순수한 동심, 즉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각과 분노,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연대는 언제나 저 동심과 같은 감수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투쟁만이 희망이라고 믿는/사람,/그 삶이 역사다’(‘역사’)라는 강도 높은 발언은 ‘보름달은/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줍니다’(‘달처럼’)라는 깊은 은유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생짜 주의주장, 슬로건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종교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얻은 결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진정한 종교인들은 신과 자신과의 거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신과의 거리가 전혀 없다고 큰소리치는 사제나 목회자들은 위험해 보일 때가 많았다. 우리가 가끔 지탄해마지 않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 그러니까 믿음을 상업화하는 종교인들 말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렴. ‘님께서 부르시면/사제가 아닌/한 인간으로 가오리다’(‘기도’) ‘둘이어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는 길다란 외로움’(‘젓가락’)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배를 불리는 것도 기적이지만 ‘기적은/한 사람, 한 사람을/빛나게 닦아내는 것/스스로 빛이 되는 것이다’(‘기적’) 놀랍지 않니? 시인이기 이전에 사제, 사제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얼마나 선연한 것인지.
아우야, 이번 겨울은 ‘지독한 갈증’과 함께 지내보거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감기 치료제가 될 것이다. 겨울의 끝에서 아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감기가 이렇게 고마운 아픔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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