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제나라에 그런 문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국(戰國)시대에 이른바 ‘직하학파(稷下學派)’를 형성하며 중국 철학의 황금 시대를 이룬 곳이 바로 지금의 쯔보 지역에 있는 제나라의 수도 린쯔(臨淄)였다.
제나라의 선왕을 설득해 자기 철학을 세상에 펼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맹자가 재상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선왕은 그를 붙들었다. 학문 연구도 하고 제자도 기를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린쯔에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맹자에게 집과 강의실을 만들어 주고 재정적 뒷받침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맹자는 그곳에 머물렀고 그의 저서 ‘맹자’도 이곳에서의 연구와 토론을 토대로 저술됐다고 전해진다. 그의 철학에 관중의 경제사상이 깊게 배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린쯔에 머문 학자와 문인은 한둘이 아니다.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공손룡(公孫龍), 굴원(屈原) 등 당대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연구하며 저술을 남겼다. 이들이 머물렀던 곳이 직하학궁(稷下學宮)이었고 여기서 이른바 직하학파가 탄생한 것이다.
직하(稷下)란 직문(稷門) 밑이라는 뜻인데 직문은 린쯔의 성문 중 하나였다. 이 직문이 린쯔의 서문(西門)이란 설도 있고 남문(南門)이란 설도 있어 어느 곳을 찾아가야 할지 걱정됐지만 막상 린쯔에 도착해 보니 고민할 일은 없었다. 제나라의 성은 다 무너져 사라지고 초라하게 성의 한 귀퉁이만 벌판에 서 있었다. 전국시대에 가장 강성한 국가였던 제나라의 모습은 그것이 전부였다.
|
제나라의 부국강병주의적 풍토가 너무 강해서일까? 길가에서는 아직도 옛 성의 잔해들을 부숴서 골재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강성했던 제나라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해체해 부국강병의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원의 제패를 꿈꾸던 제나라의 집권자들은 각국의 뛰어난 학자들을 불러모아 우대하며 자유로운 학문풍토를 조성했고 이들에게 나라의 부강책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이들 제자백가는 제나라가 번성하던 기원전 370년경부터 제나라가 망한 기원전 221년까지 이곳에서 학문의 절정기를 이뤘다.
당시 지식인들은 중원 각국의 서로 다른 문화적 풍토 속에서 다양한 학문을 형성했고 자신들의 사상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 각국을 돌아다니며 제후와 대부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중용되면 자신의 사상에 따라 나라를 경영했고 집권자와 뜻이 맞지 않으면 다시 다른 나라로 떠났다. 이렇게 맹자처럼 주유천하(周遊天下)하던 지식인들이 모여든 곳이 바로 린쯔였다.
제나라는 그들을 위해 ‘상대부(上大夫)’의 칭호를 주고 큰 집을 제공하며 강의와 토론과 집필에 몰두하도록 했고, 별다른 직책이 없으면서도 나라의 일을 의논할 수 있도록 특별히 대우했다. 여러 가지 학문에 나름의 일가견을 가진 학자들은 다채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들자면 모두가 당시 린쯔에 조성됐던 자유로운 사상적 풍토와 풍요로운 문화를 즐겼다는 것 뿐이다. 이들은 주나라가 무너지고 중원에 새로운 세력들이 부상하며 커다란 사회적 변동을 겪던 시절, 이곳에서 인류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잘 보존된 주(周)나라의 문화를 기반으로 유교가 탄생했던 노(魯)나라의 이웃이다. 노나라에는 공자의 유적이 잘 보존돼 있는 데 비해, 직하학파는 패도(覇道)로 일어났다가 몰락한 제나라와 함께 흔적도 없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물질적 풍요와 자유로운 지적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교류하며 다양한 학문의 기반을 닦은 제자백가들은 제나라가 망한 후 다시 각국에 흩어져 그곳에서 나름의 일가를 이루게 된다.
이제 제나라와 노나라의 옛 땅인 산둥성의 자동차들은 번호판에는 ‘魯’자를 새겨넣고 다닌다.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부국강병을 꿈꾸는 시대일지라도 패도(覇道)의 ‘齊’보다는 왕도(王道)의 ‘魯’를 이상으로 삼고 싶은 모양이다.
김형찬 기자 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