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교수의 뇌의 신비]너무 많이 기억하는 것도 '병'

  • 입력 2002년 11월 17일 17시 36분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도덕책에는 젊은이가 노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내용이 나온다.

노인의 대답은 뜻 밖에도 ‘망각’이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무엇이든 잘 외우는 사람을 존경한다. 잘 외워서 성적이 좋은 학생은 세칭 명문대에 진학하며 대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다. 하지만 많이 기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만큼 잊어버려야 한다. 불필요한 내용이 가득하면 컴퓨터의 용량이 초과하듯 뇌의 기억 창고 역시 무한히 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나치게 오래 간직하면 우울증이나 대인 기피증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병은 ‘망각의 질환’인 셈이다.

우리가 무엇을 잊는 것은 기억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뇌의 활동이다. 기억 기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흔히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이용한다. 예컨대 종을 친 후 전기 쇼크를 가하는 것을 되풀이하면 동물은 이를 학습해 종을 치기만해도 공포에 떨며 몸을 웅크린다.

이런 기억 행위는 편도체에서 이루어지며 여기에 글루타민 신경전달물질이 관여한다. 글루타민이 NMDA 수용체라는 단백질을 통해 기억할 정보를 다른 세포로 전달하는 것이다.

망각의 기능 역시 동일한 모델로 연구할 수 있다. 기억 학습이 끝난 후 종을 치고 나서도 아무런 전기 쇼크를 가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종을 쳐도 동물은 아무런 행동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즉 동물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은 것이다. 그런데 기억과 마찬가지로 망각작용 역시 글루타민이 관여하는 것 같다. 동물에게 NMDA 수용체를 억제하는 약제를 사용하면 망각 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망각 작용은 뇌의 변연계(가장자리계)에서 ‘CB1 수용체’라는 단백질을 통해 작용하는 카나보이드 신경전달물질이 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일 막스프랑크연구소의 루츠 박사는 유전공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선천적으로 CB1 수용체를 갖지 못하는 생쥐를 만들었다. 이 쥐들은 기억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망각 기능은 없었다.

루츠 박사는 정상 생쥐에서 CB1수용체를 억제하는 약제를 사용해 보았는데 이 쥐 역시 망각 기능을 갖지 못했다. 즉 소리를 들려 준 후 전기 쇼크 자극을 오랫동안 주지 않아도 쥐는 영원히 그 소리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했다. 망각 기능이 없는 이 쥐들이야말로 망각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울산대의대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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