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시집 ‘자작나무 눈처럼’
지난 여름 백두산 가는 길에 자작나무 군락지를 본 적이 있다. 곧은 몸체를 덮고 있는 희디흰 수피는 얇은 종이처럼 옆으로 갈라지면서 크고 작은 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검은 점들은 어찌 보면 상처 입은 눈 같고, 어찌 보면 소리없이 웃고 있는 입 같기도 했다. 서점에서 이종수라는 낯선 시인의 첫 시집을 집어든 것은 ‘자작나무 눈처럼’(실천문학사)이라는 제목이 그때의 기억을 부추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약력을 보니 그는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집의 한 부는 남쪽 바다와 섬들에 바쳐지고 있다. 그런 시인에게 저 북방의 대륙에서나 볼 수 있는 자작나무는 대체 어떤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시집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그에게 남쪽 바다와 북쪽 대륙의 기질이 공존하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자작나무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의 시에는 상처 입은 눈과 웃고 있는 입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활달한 풍자와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시편들이 정제된 서정이나 엄숙한 깨달음과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이질적인 두 세계가 분열보다는 경쾌한 중첩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모순된 공존이 수사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동음이의어다. ‘그늘진 골목 눈은 녹지 않고/뜨거운 오줌발을 받으며/여러 개의 눈으로 깊어지며 올려다본다’(눈구멍)는 시에서 눈은 설(雪)이자 안(眼)이다. 순결한 눈과 뜨거운 오줌발이 만날 때 또 하나의 눈은 생겨나 깊어지는 것이다.
‘눈이 멀고 천 길 낭떠러지의 얼음을 깨고 또 낭떠러지에 떨어져도/오체투지의 밝은 눈 속으로 들어가리라/그 눈처럼 살리라/자작나무 눈처럼’(자작나무 눈처럼)이라는 다짐에서도 ‘눈’의 울림은 겹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가 굴비를 내어 말리는 법성포 파도소리를 ‘屈非 屈非 屈非’라고 듣거나(영광굴비), ‘시인은 시비를 피뢰침 삼아 세상과 시비한다’(시비)고 말할 때 동음이의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신념의 표현으로까지 보인다.
이처럼 삶을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의 끝없는 싸움으로 여기는 그에게 반어적 시선이나 어법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은 ‘동음이의어의 능멸과 환멸’ 속에서 ‘어감상의 혼돈’을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매연과 유곽의 성채’ 속에서 시인이 아로새기는 시비(詩碑)는 세상에 대한 무력한 시비(是非)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헛된 노릇이 아니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넉넉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아이러니는 원래 고대 희극의 ‘에이론’이라는 인물에서 유래된 말이다. 힘이 없지만 영리한 ‘에이론’이 결국은 힘세고 거만한 ‘알라존’을 쓰러뜨렸듯이, 그가 ‘에이론’의 후예로서 ‘어감상의 혼돈’을 넘어 혼돈과 불일치에 대한 감각을 전면적으로 밀고 나가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이것은 동갑내기 시인에 대한 기대이자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기도 하다. 나 희 덕 시인·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