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강형철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 입력 2002년 11월 29일 17시 49분


■강형철 시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멋도 모르는 도시내기들이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항구도시를, 퇴색한 적산가옥 골목을, 겨울 바다의 수면을 저미는 칼바람을 좋아한다며 피식, 웃던 형의 순한 옆얼굴이 생각납니다. 째보선창에서 한잔 걸치고, 허청거리며 혼자 월명공원에 올라 마주하는 열엿새 달, 그 달빛이 갈수록 무거워진다는 형의 웅얼웅얼대는 혼잣말이 그립습니다.

퇴근길에 서점에 들렀다가 강형철 시인이 오랜만에 내놓은 새 시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창작과비평사)가 눈에 띄기에 얼른 집어들었습니다. 시인 역시 군산 출신인데다가 이번 시집이 10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이어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집에 가는 좌석버스에 앉아 표제작부터 찾았지요.

표제작 ‘도선장 불빛 아래’는 ‘아립’니다. ‘백중사리 둥근 달’이 떠 있는 도선장. 시의 화자가 언젠가 ‘꼭 한 번 손을 잡았던 여인’을 발견합니다. 우연이겠지요. 어느새 ‘뜨거운 날’로 돌아가 있는 ‘나’는 선창가 포장마차로 들어섭니다. 그 여인의 행방에 대해선 짐짓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술과 안주를 시키는데 ‘생합, 살 밑에 고인 조갯물 거기다/한 잔 소주면 좋겠다’라며 더듬거리는 거예요(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술안주를 저렇게 주문하지 못합니다).

시가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마지막 대목에서 ‘부두를 덮치던 파도’가 ‘백중사리 둥근 달’을 포장마차 안으로 데리고 옵니다. 파도는 ‘나’이고 둥근달은 그 여인일 텐데, 그날 밤 선창가에서 옛 여인과 헤어지던 ‘나’는 가슴이 얼마나 짠했을까요.

위 시가 이번 시집의 제1주제는 아닙니다. ‘10년 전의 일기장에’에서 두드러지듯이, 이번 시집의 주어는 민중에서 서민으로, 지식인에서 소시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년 시인의 예민한 자의식입니다.

그 자의식은,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사이에 놓여 있는 저 유신 세대, 아니 1980년대 민중시인들의 그것입니다. 10년 만에 꺼내 든 일기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고백은 그러니까 반어법이겠지요. 무력감 혹은 자책에서 비롯한.

하지만 저는 이번 시집에서 1980년대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추적하기보다는, ‘대책없는 내일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중년의 내면 풍경 앞에서 체감온도가 부쩍 올라갑니다. 전세금과 연체독촉장에 시달리면서도 천민자본주의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지식인의 분열증적인 정체성은 제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이번 시집의 진정한 주어는 거대도시가 거들떠보지 않는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로 보입니다. ‘도선장 불빛…’은 2002년 겨울, 서울에서 살아가는, 늘 깨어있고자 애쓰는 한 중년 시인의 심전도입니다. ‘가슴 앞에 불 하나씩 단정하게 달고 있는’ 산동네집과 더불어 ‘야트막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의 지도입니다.

그야말로 대선정국입니다. 말, 말, 말들이 횡행하는 시절. 모든 언어가 무기(武器)로 돌변해 있는 이때, 시를 붙잡고 부디 모국어가 악기(樂器)이기를 바라마지 않는 제가 얼마나 무참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형, 대선이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군산 도선장 불빛 아래 서 계십시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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