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경제 이야기]反美와 맥도널드 문명

  • 입력 2002년 12월 20일 18시 38분


영화 '백경'
영화 '백경'
한국 진출 미국기업 ‘불매운동’ 불똥 튈까 한걱정

한국의 어린 여학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사건으로 반미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 기업들이 이러한 기류가 자사 제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반미 운동의 주무대도 공공기관에서 ‘시장’으로 옮겨가는 듯하다. 1980년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서 보듯 과거 반미감정의 표출은 미국이란 나라를 대표하는 관공서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미감정이 높아질 때마다 한국의 거리 곳곳에 있는 햄버거 가게나 미국서 건너온 레스토랑들이 관공서 못지않게 긴장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신 보도를 보면 중국 베이징의 반미 시위대나 세계화에 반대하는 프랑스 농민들은 미국대사관 대신 맥도널드 매장을 공격한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란 책이 있다. 세계화의 현상과 양태를 다룬 그 책에서 프리드먼은 흥미로운 이론 하나를 제시해 눈길을 끈다. 이름하여 ‘골든 아치’ 법칙. 여기서 골든 아치는 햄버거 체인점인 맥도널드의 심벌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거리에서나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활 모양의 황금색 아치 두 개가 잇닿아 있는 모양의 로고다. 골든 아치 이론이란 ‘맥도널드가 진출해 있는 나라들간에는 전쟁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흥미롭지만, 저널리스트가 저지르기 쉬운 현상적인 관찰에 의한 단견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다만 주목할 점은 맥도널드를 매개로 한 동질적 세계를 상정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맥도널드 문명권’쯤 되는 셈이다. ‘맥도널드 문명’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맥도널드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맥도널드 햄버거의 맛을 매개로 통합된 세계의 상징으로,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전하는 키워드인 것이다.

과거 서구 문화 전파의 첨병이 성경을 손에 든 선교사들이었다면 이제는 맥도널드 로고와 한입 베어물고 싶은 햄버거의 맛이다. 몇 달러짜리 하찮은 ‘무기’지만 두 겹의 햄버거 빵과 가운데 들어가는 패티(다진 쇠고기 조각)의 전파력과 이데올로기는 더욱 막강하다.

그건 50년 전 맥도널드 형제가 캘리포니아 주의 작은 도시 샌 버너디노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햄버거 가게를 낼 때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맥도널드가 급속도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최대 비결은 ‘표준화’였다. 극히 세부적인 부분까지 지시된 매뉴얼로 만들어지는 햄버거는 세계 어디를 가도 맛이 똑같다.

맥도널드 이후 생겨난 모든 패스트푸드점은 사실 맥도널드의 복제판에 불과하다. KFC건 버거킹이건 한국의 롯데리아건 매장의 주문 조리 시스템은 다 똑같다.

이 점에선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도 같은 운명을 걸었다. 한국서도 이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된 체인점이지만 원래는 지금처럼 북적거리는 곳이 아니었다. 스타벅스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미국 시애틀에서 문학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던 점잖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고 그러다가 커피 가게를 차리게 됐다.

스타벅스란 이름부터가 이들의 문학적 취향을 드러낸 것이다. 영화 ‘백경(모비딕)’을 본 사람이라면 광기 어린 선장 에이허브(그레고리 펙 분)에 맞선 항해사를 기억할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하는 그 항해사의 이름이 바로 스타벅스였다. 옛날 포경선들이 출항하던 항구도시 시애틀의 문학도들은 자신들의 문학적 아지트에 미국 해양문학의 대표작인 백경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던 스타벅스가 지금의 대규모 체인점이 된 건 하워드 슐츠라는 전문경영자가 합류하면서부터다. 그는 스타벅스에 표준화·효율화의 원리를 도입해 지금의 거대 체인점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늑한 커피의 세계를 추구하던 창업자들은 그의 경영방침에 반발해 떨어져 나갔다.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식으로 표현하자면 올리브 나무가 렉서스에 밀려난 셈이다.

이명재 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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