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시부모는 서울에만 빌딩을 서너채 갖고 있을 정도로 부자다. 남편과 만나 1년 동안 사귀고 결혼을 결심할 때도 솔직히 시부모의 경제력에 어느 정도 마음을 두었던 것도 사실이다.
못사는 시집을 둔 것보다는 이왕이면 잘사는 집에 시집 가면 한푼 두푼 아끼느라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에서다.
내 예상은 맞아 결혼 후 우리 부부는 시집의 도움으로 같은 또래 부부들에 비해 내 집 장만도 빨리 했고,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자 시부모는 사업을 하라며 피자가게까지 차려주셨다. ‘돈이 돈을 번다’고 비싼 보증금을 주고 목 좋은 곳에 자리잡은 피자가게는 하루가 다르게 매상이 올랐고 그만큼 우리 부부의 재산도 늘어만 갔다. 한동안 돈 버는 재미, 돈 쓰는 재미에 흠뻑 젖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요즘 내 생활이 다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결혼 5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나를 하인 부리듯이 마구 대하는 시부모와 시부모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쩔쩔 매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민다.
함께 살지는 않지만 시부모는 우리집을 마치 제집 드나들 듯한다. 시어머니는 온다는 말 한마디 없이 불쑥 찾아와 싱크대 서랍과 화장대를 살펴보고는 “ 찻잔은 있는데 왜 또 샀냐? 너는 왜 그리 사치가 심하냐?” 하며 잔소리를 하신다. 언젠가 내 빨간 립스틱을 보시고는 “야간 업소에 나가냐? 주부가 빨간 루즈가 뭐냐?” 며 호통을 치실 때는 어이가 없어 말이 다 안 나왔다.
아이들 데리고 주말에 친정이나 나들이라도 가려고 하면 언제 그 계획을 아셨는지 금방 호출이다. 친정부모는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일년에 몇번 찾아뵙지 못해 너무 서운하고 친정부모에게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더욱 짜증이 나는 것은 남편의 태도다. 아무리 부모에게 도움을 받아도 그렇지 아이가 둘이나 되는 한 집안의 가장인데, 어쩜 그리 부모 앞에선 기가 죽고 쩔쩔 매는지 모르겠다. 시부모 말씀과 행동이 언짢아 내가 얼굴이라도 조금 찡그리고 있으면 바로 부부싸움으로 이어진다.
집안 대소사는 뭐가 그렇게 많은지,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의 대소사까지 일일이 챙겨야 하니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일가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음식 맛이 없다며 “너는 대체 시집 오기 전 요리학원에 다니지 않고 뭐 했냐?”며 사촌 동서들 앞에서 타박을 할 때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요즘 들어 돈 많다고 사람 우습게 보는 시부모 얼굴 보기도 싫고, 시부모 앞에서 내 편이 돼주지 않고 오히려 시부모 말에 맞장구를 치는 남편이 너무 밉다. (결혼 5년차·아이 둘·서울 상계동 주부 B씨·35세)
차라리 미스코리아를 며느리로 삼지 그래요
내 친구들은 돈 많은 시어머니 두어서 좋겠다며 시샘 반, 부러움 반으로 나를 쳐다보지만 모두 겉만 볼 뿐 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것은 보지 못한다.
돈 많은 시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내 앞에서 위세가 당당했다. “너희들이 잘 해야 이 재산 모두 물려준다. 나한테 서운하게 하면 한푼도 못 준다”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처음에는 나이 드신 분이니까 이해하려고 했다. 시부모가 돈이 많은 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속이 상해도 참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아들 둘, 딸 하나 둔 집안의 장남인 남편은 시어머니가 나를 막 대해도 별 말을 하지 못한다. “ 우리 엄마 성격이 워낙 급해서 그래, 그래도 뒤끝 없는 화끈하신 분이니까 네가 좀 이해해줘라”고 하면서 나를 달래기만 할 뿐 시어어머니 앞에선 ‘고양이 앞에 생쥐꼴’이다.
시부모는 내 용모를 갖고 트집을 잘 잡으신다. “너는 키가 왜 그리 작니?” 부터, 음식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는 것 같으면 “키도 작은데 살까지 찌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대책 없이 먹어대냐?” 하며 노골적으로 내 몸매에 불만을 나타내신다. 누구집 며느리는 탤런트 뺨치게 예쁘다며, 돈 대줄 테니 성형수술을 받으라고 할 때는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정도다. 언젠가 남편이 학생 때 잠깐 만났던 여학생이 참 예뻤다며 그 애 소식을 남편한테 물어볼 때는 시집이고 시어머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던 적도 있었다.
내 키는 160cm이고 몸무게는 58kg이다. 예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귀여움 받고 자랐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노골적으로 내 외모를 탓하며 “ 너 그 외모 갖고 남편이 바람 피워도 할 말 없다. 돈 대준다고 할 때 빨리 성형수술해라” 며 비아냥거린다.
어쩌다 친정에 다녀오려고 하면 “ 출가외인이 친정에는 왜 자주 가냐?” 며 “ 네가 결혼할 때 제대로 격식 갖춰서 해온 게 뭐가 있니?” 하실 때는 내가 이 집 며느리가 아닌 것 같다.
친정이 좀 가난하다고 무시당하고, 외모 갖고 잔소리 듣고 사는 것을 친정부모가 아시면 얼마나 마음 상하실까 하는 생각에 혼자 울 때도 많다. 요즘에는 너무 힘들어 차라리 아기가 생기기 전에 이혼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결혼 1년 차·일산 주엽동 주부 C씨·28세)
나는 사위가 아니라 처가의 영원한 종?
내가 아내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을 노골적으로 ‘돈 많은 처가’를 두어 좋겠다는 말들을 했다. 나도 없는 것보다는 좀 있는 게 낫겠다 싶어 알게 모르게 마음이 든든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아내는 딸만 둘 있는 집안의 장녀다. 장인 장모는 아내가 큰딸이어서 그런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듯한 집안에 번듯한 약력을 가진 사위를 얻고 싶었는데,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청춘을 다 보낸 부모와 형 둘, 시집 안간 여동생 둘인 집안에다가 직장도 알아주지도 않는 중소기업체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를 탐탁치 않게 대하는 처가의 태도에 약간 섭섭했지만, 딸 가진 부모들 마음이려니 하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우리 부부의 생활계획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처가는 우선 우리가 살 집을 처가 근처로 정할 것을 요구했다. 처가 근처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 살라는 것이다. 전세금만 2억원이 넘는 아파트에 들어가 살 돈도 없고 달랑 두 식구 사는데 34평 아파트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옛말에 ‘ 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신세 안 진다’는 말이 있는데, 결혼 초부터 처가 신세를 지니 자존심이 팍 상했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른 채 친구들은 부럽다며 ‘처가 덕에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집장만하겠다’며 비아냥거리는 것도 참기 어려웠다.
처가 옆에 살면서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일들이 마구 발생했다. 아내는 틈만 나면 처가에 가서 장모와 쇼핑하고 하루종일 놀다가 저녁에야 집에 온다. 부잣집 딸로 집안 일을 해보지 않아서인지 집안일은 하지 못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은 입고 나갈 와이셔츠가 없어 세탁기에서 꺼내 냄새만 대충 없앤 후 입은 적도 있었다.
장모는 김치며 고기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는 “0서방이 너를 잘 챙겨 먹이지 못하는 것 같다’며 ‘ 없는 시집 만나고 돈 잘 못 버는 신랑 만난 것도 다 네 팔자”라며 내 앞에서 한숨까지 내쉴 때는 그야말로 너무 화가 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부부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아내는 처가로 쪼르르 달려가고 장인은 “ 네가 결혼해서 내 딸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 고생시키려고 내 딸하고 결혼했냐?” 며 나를 막 대하신다. 너희 부부가 그만큼 사는 것도 다 처가 덕이라고 노골적으로 말을 할 때는 아파트 전세금을 몽땅 돌려주고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
우리집보다는 처가 식구들의 생일을 먼저 챙겨야 하고 장인이나 처제 등 처가집 사람들과도 잘 지내야 한다. 만약 장인장모가 아프기라도 하면 만사 제쳐두고 처가로 달려가야 한다. 이런 나를 보고 우리집에서는 “아예 호적 파가서 그 집 아들 하라”고 하신다.
분명 아내가 좋아서 결혼했고 열심히 살면 그런대로 아쉽지 않게 잘살 수 있을 거라는 순박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가의 지나친 간섭으로 이런 꿈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결혼 2년 차·성북구 길음동 P씨·33세)
못사는 시집, 처가 둔 사람들의 하소연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여자였는데
지금의 남편과 중매로 만나 결혼한 지 3년째. 그동안 우리 부부에게 남은 건 18개월 된 아들 하나뿐인 것 같다. 시부모 때문에 생긴 남편과의 갈등, 일일이 내 씀씀이를 참견하시는 시부모 앞에서 난 늘 죄인처럼 살아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위로 오빠만 둘이고 막내 외동딸인 나를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셨고, 학창시절 용돈도 늘 두둑하게 주셨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내가 번 돈은 모두 내가 썼다. 좀 사치스럽다 싶을 정도로 핸드백이며 구두, 화장품 등을 외제 브랜드를 써왔다.
남편과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을 때 남편 집안형편이 우리집보다 좀 어렵더라도, 사람 하나 보고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남편의 집안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가난했다. 달랑 방 두개뿐인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영 불편한 게 아니었다. 생활비를 주지 않으면서 살림을 맡으라고 할 때는 솔직히 내가 결혼 전 모아 둔 비자금을 생각하고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어쩌다 생활비 좀 달라고 하면 “농사 진 쌀 있고 밭에서 나는 음식으로 반찬 만들면 되지 돈이 뭐가 필요하냐?”고 하실 때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새색시답게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점점 숨통이 막혀 온다. 어쩌다 남편에게 잘 사는 시집을 둔 친구들 얘기라도 꺼내면 “ 너도 그럼 잘 사는 집에 시집가지, 왜 나한테 왔냐? 친정이 좀 잘산다고 유세 떠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언젠가는 결혼 전 모아놓은 돈으로 시내에 나가 아기 옷을 사 입혔는데, “애기한테 왜 그렇게 비싼 옷을 입히냐”며 시부모는 물론 남편까지 나서서 나를 야단쳤다. 늘 사 입히는 것도 아니고, 내 돈으로 아기한테 예쁜 옷 한벌 사주고 싶어 사줬는데 그게 무슨 큰 죄라고 죄인 다루듯 할까?
남편은 생활비도 잘 주지 않으면서 나만 보면 돈 아끼라고 강요하고, 시부모는 “물려줄 재산 없으니까 애하고 살려면 젊었을 때 돈 쓰지 말고 한푼이라도 더 모으라”고 하신다. 맞는 말이지만 나도 돈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남편과 시부모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너무 사치스럽다고 몰아세우는 것 같아 서운하다.(결혼 3년차·전북 고창 주부 J씨·33세)
시부모, 시동생에게서 이젠 벗어나고파!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남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남편은 아주 못사는 집안의 장남이자 수재로 가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라났다. 대학 역시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의대에 들어갔고 졸업 후 나를 만나 결혼하면서 개원을 했다.
사람들은 내과의사로 개인병원 하나 갖고 있으면 대단히 돈 잘 벌고 떵떵거리며 살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상황은 정반대다. 남편은 나와 결혼하면서 살 전세집도 신용대출을 받아 마련했고, 개원한답시고 이리저리 돈을 많이 빌렸다. 결혼 비용은 거의 내가 부담했다. 그나마 남편 병원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질 때도 종종 있다.
한달 번 돈으로 대출금 원금과 이자 갚고 아이 키우고 전세금 올려주고 하면 남는 게 없다. 그런데도 시동생들은 마치 형이 돈을 쌓아놓고 지내는 사람처럼 도와달라며 손을 내민다. 시부모 역시 남편 보고 “우리는 여력이 없으니 시동생들을 잘 도와주라”고 늘 말씀하신다.
첫째 시동생 장가갈 때 결혼 비용과 전세자금 일부를 대출받아 해주었고, 막내 시동생 결혼할 때도 역시 대출 받아 전세 자금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도 시동생들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당연하게 여긴다. 형제끼리 돕고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떨 땐 시부모나 시동생이 너무한 것 같아 야속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남편도 가끔 돈 생각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지 요즘 들어 술 담배를 많이 한다. 시부모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까다롭게 대하시지 않아 편하긴 하지만 큰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경제적인 도움을 끊임없이 요구하실 때는 솔직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갚아나가야 할 빚도 많고 아이들도 키우고 집장만도 해야 하는데, 시집으로 돈이 너무 많이 흘러나간다. 결혼 10년 동안 벌어서 우리 부부를 위해 쓴 돈은 하나도 없고 모두 남만 위해 쓴 것 같아 허탈하다. (결혼 10년 차·영등포구 신길동 주부 H씨·39세)
처가에 들어가는 돈,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아내와 학창시절에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아내의 집안은 무척 가난한 편이어서 아내는 재학 시절 내내 두 가지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그런 아내가 안쓰러워서 내 용돈 중 일부를 떼어 옷이나 교재를 사주기도 했다.
연애 시절에는 아내의 집안이 가난한 것이 내겐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하지만 정 많고 따뜻한 아내 가족들이 좋았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 5년 동안 살면서 처가 식구들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아내와도 자주 싸웠다.
물론 장인장모가 나를 친자식 대하듯 편히 대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나한테 처갓집 대소사를 모두 맡길 때에는 솔직히 난감했다. 장인장모를 대신해 들어가는 경조사비가 한달에 20만원이 넘을 때도 있었고, 처제 학비를 대출받아 대주기도 했다. 나 역시 부모한테 물려받은 유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돈 나올 구멍도 뻔한데 월급의 절반 이상이 처가로 흘러가니 이젠 ‘ 돈을 벌면 뭐하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내에게 우리도 애와 살려면 저축을 해야 하니 어느 정도 처가와 간격을 유지하자고 말하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 당신이 그렇게 돈만 아는 뻔뻔한 사람인 줄 몰랐다”며 “ 지금부터 내가 번 돈은 모두 우리 부모님 줄 거니깐 간섭하지 말라”며 오히려 화를 낸다. 우리의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경제적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처가 식구들이 점점 싫어진다.(결혼 5년 차·경기도 수원 H씨·36세)
시집 스트레스 이렇게 극복했다
비록 못된 며느리 소리 들어도 내 입장 당당하게 주장했다
남편과 연애를 할 때부터 시어머니는 나를 들들 볶았다. 자기 아들도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했으면서 내가 졸업한 학교가 삼류대라고 하질 않나, 혹시 시집 재산을 처가에 퍼다 주지나 않을까 의심해 우리집 재산 여부를 알아보는 등 정말 짜증나는 행동을 많이 하셨다. 오죽했으면 시어머니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결혼 1년 동안 잘사는 시집 덕을 좀 보긴 했지만 맘 고생도 많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재력으로 며느리 기를 꺾어보겠다는 시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일. 시집의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결혼하면서 그만둔 직장에 다시 나갔다. 집에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시어머니로 인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 그보다는 힘은 들더라도 나가서 돈을 버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물론 처음에 시어머니는 내가 일을 한다는 것에 반대했다. “남편 잘 거두어 먹이고 집안 살림하라고 했지, 누가 너 보고 돈벌어 오랬냐?” 며 싫은 내색을 하셨다. 그런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편을 살살 달래 내가 직장일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돈을 벌어 시부모의 경제적인 도움 없이도 우리 부부가 잘살 수 있다는 것을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다.
반대를 해도 내가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자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말은 듣지도 않는 못된 며느리” 라며 화를 내시더니 이제는 포기했는지 직장일에 대해서는 말도 하지 않으신다.
직장에 다니면서 힘든 것도 많지만 어느 정도 시집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사라진 것 같다. 우선 낮에 빈 집이니 시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찾아와 간섭하지도 않고 직장일을 핑계로 일일이 집안 대소사를 챙기지 않아도 돼 편안하다. 그전에는 일가친척 대소사는 모두 따라다녔지만 지금은 꼭 가야 할 곳, 필요한 곳에만 간다.
그래도 시부모가 섭섭해할 것 같아 주말에는 꼭 시집에 가서 식사를 한다. 내 월급으로 생색을 내며 시부모님께 맛난 음식을 사드리기도 하고, 선물을 사서 드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 힘으로 잘살 수 있으니 지켜봐 달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있는 집안에 시집 갔으니 이것저것 신경 안 쓰고 시부모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며 말 잘 듣는 며느리로 사는 게 어쩜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는 법. 주면 줄수록 그만큼 요구하게 마련이다.
도움 받으면서 스트레스 받으며 사는 것보다 좀 힘이 들어도 내가 벌어 당당히 쓰는 게 나은 것 같다. 그래야 가끔 시부모에게 바른 말도 할 수 있다. 물론 직장일을 핑계로 시부모에게 너무 소홀하면 남편과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다. 적당히 잘 하고, 비록 못된 며느리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결혼 4년차·경기도 평촌 신도시·맞벌이주부 K씨·32세)
처가 스트레스 이렇게 극복했다
처가의 도움 자연스럽게 끊었다
결혼을 앞두거나 이미 결혼을 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왕이면 못사는 처가보다는 잘사는 처가를 두는 것을 좋아한다. 나 역시 그랬다. 처가의 든든한 후원은 내 생활을 좀더 여유있게 만들어 주었다. 교사인 아내는 육아 때문에 교사 생활을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았고 나 또한 아내가 아이 키우느라 교사직을 포기한다는 게 아까웠다.
육아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선뜻 장모가 아이를 맡아서 키워주겠다며 처가 근처로 이사 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부부는 ‘웬 떡이냐’ 싶어 서둘러 방을 빼고 전셋집을 알아보았다. 처가 근처는 전세 값이 만만치 않아 대출을 받으려고 했는데 처가에서 “젊은 사람이 돈 빌려버릇하면 못쓴다”며 모자란 금액을 채워주셨다. 그때까지는 정말 처가하고 잘 지내고 앞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처가 근처로 이사간 지 한달이 좀 넘자 장모님의 본성(?)이 서서히 나타났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집에 드나드는 것은 고사하고 마치 나를 데릴사위 취급했다. 아이 봐주고 경제적으로 도와주시는 것이야 고맙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처가와 선을 확실히 긋고 싶었다.
먼저 아내에게 내 불편한 감정을 얘기했다. 내 말을 곰곰이 들은 아내는 처음에는 무척 서운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모가 애까지 봐주는데 사위라는 사람이 처가 일 좀 한다고 짜증을 부리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밖에.
물론 나도 처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의 문제다. 우리 부모님 생신 때는 찾아뵙지 못해도 처갓집 대소사에는 꼭 가야 하고, 우리 조상 성묘는 가지 못해도 처갓집 성묘는 가야 했다.
안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아이를 맡길 보모를 알아보자고 했다. 처가에서 도움만 받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만 다니기 때문에 이왕이면 육아문제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않는 게 낫다 싶었다. 집 구할 때 처가에서 대준 돈 중 일부는 갚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처가와 모든 인연을 끊고 사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처갓집 대소사는 일일이 챙긴다. 장모님 마음 섭섭하지 않도록 아이와 함께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문안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아내에게 “내가 처가한테 하는 것처럼 시집 식구를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집, 처가 나누어 누구한테는 더 잘하고 소홀할 것이 아니라 양쪽 부모 모두에게 똑같이 해주면 서로 섭섭할 것도 없고 자기만 피해본다는 스트레스도 없어질 것 같다.(결혼4년차·은평구 역촌동 K씨·36세)
글=최희정(자유기고가)
일러스트=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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