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은 '실천력'이 아니라 '당선력'이라는 선거판. 하지만 그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 없다며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거부하는 진정성으로 구태의연한 정치 풍토와 거리를 둔다.
그리고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며 수줍게 유권자에게 다가간다. 이처럼 정치드라마를 표방한 '대물'의 주인공 서혜림(고현정 분)이 정치인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은 이상적이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진부하고 상투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력적이다. 서혜림은 현실 정치에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더 간절하게 만나고 싶은 국민의 바람이 만들어 놓은 허상(虛像)일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 서혜림은 남편의 죽음이라는 불의의 사고로 정치적 각성을 하기 전까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입사한 직후에는 뛰어난 외모와 지성을 겸비한 재원으로 주목받았던 적도 있던 그녀지만, 생방송 울렁증과 고소공포증으로 메인 프로그램에서 밀려난 뒤로는 유아 프로그램 진행자로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카메라 기자와 결혼하여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아나운서 생활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던 맞벌이 주부 서혜림의 일상은 카메라 기자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하던 남편의 억울한 죽음 이후 분노와 좌절로 점철된다.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함께 피랍된 일본 기자가 석방된 것과 달리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남편의 영정 사진 앞에서 대통령의 조화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고 서혜림은 대통령이 보내온 조화를 부수며 오열한다.
그리고 빠듯한 생활비 때문에 남편의 취미 생활을 타박한 것이 남편과의 마지막 장면이었다는 자책감과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한 서혜림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대체 누굴 위한 나라입니까! 국회의원들한테 국민은 선거 때 찍어주는 한 표, 두 표, 표 밖에 안 되는 겁니까! 개가 집을 나가도 찾는데! 우린 개만도 못하다는 겁니까! 우린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라는 그녀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남편의 유품을 직접 가지고 찾아온 대통령에게 "다시는 나라가 지켜주지 못하는 국민이 생기지 않게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대통령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는 해도 서혜림은 여전히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 주체로 나서기보다 외국으로 이민가 약소국의 서러움을 회피하려 한 것도 그래서이다.
서혜림은 고향에서 간척지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 현장을 목격하면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간척지 개발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개발 이익을 둘러싼 정치적 이전투구 때문에 주민 피해는 외면받는 현실 앞에서 '정치'의 본질과 의미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간척만 해놓고 30년간 황무지로 방치한 매립지에 서식하는 모기 때문에 고생하던 마을 주민들이 시위에 나섰다가 구속되는 사건을 겪으면서 법의 맹점을 깨달은 서혜림은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검사 하도야(권상우 분)에게 주민을 대신하여 항의한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나가는 판에 무조건 법 지키라고! 지키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딨어?"
이러한 항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법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산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현실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곳 없는 서민들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서혜림은 이렇게 평범한 여성에서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 뉴스메이커가 돼 세상의 주목을 받다가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간척지 개발 폐해를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이상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간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없다. 다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석될 뿐이다. 간척지 개발에서 비롯된 주민들의 피해가 충분히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보도를 부탁하는 그녀의 행동을 정계 진출용 경력 쌓기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보도국 선배 앵커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서혜림의 행동은 정쟁을 일삼는, 정치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일상을 편안하게 해주는 생활 정치라는 점에서 이미 정치적이다. 현실 정치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생활 정치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서혜림의 정치적 역량은 충분하지만, 그녀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서혜림의 정치적 역량은 대권 도전의 야망을 키우고 있는 패기 넘치는 3선 국회의원 '강태산(차인표 분)'에 의해 일깨워진다. 집권 여당의 보궐선거 책임자로 지명된 강태산은 서혜림을 보궐선거에 출마시키기 위해 설득에 나선다.
정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서혜림은 정치란 "모기떼 사건으로 사람들을 대변하던 일"이며, "주민들을 위해 나섰다가 서러움에 눈물 젖은 일"이라는 강태산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정치란 잘 하면 개발로 오염된 강에 은어가 돌아오게 하는 것이고, 못하면 은어 씨를 말리는 것이라는 하도야의 설명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보궐선거 출마를 결심한다.
"깨끗한 정치, 약속을 지키는 정치"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선거운동에 돌입한 서혜림이 극복해야 할 현실 정치의 벽은 결코 만만치 않다. 강태산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돈과 조직에서 열세에 놓인 서혜림이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혜림은 지역 발전과 국가 이익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으로 유권자를 현혹시키는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버리고 생활 정치 공약을 개발하면서 선거 전문가는 물론 유권자의 마음까지 돌려놓는데 성공한다.
나라가 지켜주지 못하는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 정치를 시작한 서혜림은 "대한민국에서 더는 국가가 지켜주지 않는 국민들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도전해서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녀가 평범한 여성에서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지극히 이상적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정치는 정치인들 간의 정쟁이 아닌, 국민을 위한 생활 정치 실천이다.
서혜림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던 그릇된 정치 현실을 바꿔나가면서 이상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간직한 캐릭터이다. 이상적인 정치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고 기대했던 만큼 익숙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서혜림의 행동 역시 진부하고 상투적이지만, 그래도 현실 정치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라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했던 여성이 개인적 불행을 극복하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아직까지는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한 드라마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대중의 욕망을 대리 충족시켜주는 사회문화적 기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대물'의 서혜림에 대한 시청자의 지지를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
서혜림은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이상적인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현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허구의 세계이지만, 때론 현실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국민을 위하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서 서혜림의 정치적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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