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율화의 The Fan] 지연·학연 보다 야연…사회생활이 술술 풀려요

  • 스포츠동아
  • 입력 2011년 2월 18일 07시 00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어색한 상황이 종종 닥쳐온다.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과 화기애애함을 유지하며, 적당히 세련되게 이끌어 가야 하는 자리. 멋쩍기 짝이 없는 그런 순간에는 적당한 윤활유가 필요한데, 내 경우 야구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몇 해 전, 어느 높으신 분을 만나 협의(사실은 부탁)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을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자리를 마련했으나, 그 분의 높은 직책과 연배에 지레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없었으니 애써 꺼낸 화제가 족족 어긋날 수밖에. 얼굴에는 억지 미소, 등에는 식은 땀. 그 와중에 어쩌자고 야구 소식은 그리 궁금한지, 틈틈이 핸드폰으로 경기 상황을 체크하고 있을 때, 그 분이 불쾌한 기색으로 물으셨다. “중요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핸드폰을 자주 보시네요.”

난감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밖에. “죄송합니다. 제가 한화팬인데, 오늘 류현진 선수가 등판하는 날이라 너무 궁금해서 그만….” 그 순간, 그 분이 반짝하고 눈을 빛내시더니 다급하게 한마디를 던지시는 게 아닌가.

“저기, 롯데는 지금 어떻게 되고 있어요?” 알고 보니 그 분은 롯데의 역대 성적은 물론, 2군 타자들의 개인 기록까지 두루 꿰고 계실뿐만 아니라, 부산·경남 지역 고교팀의 경기까지 보러 다니는 열성 야구팬이셨던 것. 이럴 수가! 어린이 대공원에서 잃어버렸던 큰 오빠를 다시 만난들 이리도 반가울까!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예의, 체면, 매너 등은 집어던지고 폭포수 같은 수다를 쏟아 냈다.

우승의 순간 펑펑 울던 기억을 나누며 눈물을 글썽이고, 암흑기의 울분을 토로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은근 슬쩍 서로의 팀을 칭찬해 주는 센스도 발휘하며…. 그렇게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뒷전으로 제쳐 놓았던, 애초에 목적한 업무도 잘 해결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이듬해, 그 분이 “야구는 역시 사직 구장!”이라며 임지를 부산으로 옮기신 이후에도 우리는 꾸준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당시에는 내가 그 분을 위로해 드렸지만, 요즘은 한화의 성적이 안 좋다 보니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것 뿐.

처음 만나는 사람과 학연·지연을 따져 보는 이유는, 뭔가 공통점을 찾아 화제를 계속 이어가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야구만큼 좋은 화제가 또 있을까. 수많은 선수들, 수많은 경기들이 죄다 동창이며 친지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학연·지연은 철폐하고 야연(野緣)을 따져 보자. 생각지도 못하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 말이다.구율화 변호사
야구선수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 마련에 관심이 많다. 야구계 변방에서 꾸준히 팬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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