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에 대한 인상은 인터뷰 전 후로 나뉜다. 배우 성유리(30)도 그랬다. 인터뷰 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랐을 것 같았던 인상은 인터뷰 후 털털하고 '깡'있는 또래 여자들과 다를 것 없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녹취를 풀며 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질문에 길게 답하지는 않지만 주어와 동사가 딱 들어맞는 완벽한 문장으로 답한다. 보통 인터뷰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에 중언부언하거나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인데 이 여자, 만만치 않다.
최근 종영한 '로맨스 타운'에서도 작가마저 "너무 예뻐 걱정이었다"고 할 정도로 인형같은 외모로 억척 식모 노순금을 능청스럽게 연기한 내공은 인터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 "'워너비 여성상' 순금, 나와 닮은 점 많아"
-순금이는 떠나보냈나요?
"아직은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끝내지 않은 것 같은 아쉬움도 있고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뚝 끊긴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만약 드라마가 연장됐다면?
"건우(정겨운)와의 로맨스가 좀 더 디테일하게 묘사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희망만 보여주고 끝났잖아요. 순금이 건우가 1000억 자산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갈등도 생길 것이고 그 안에서 또 로맨스가 있었겠죠."
-건우 부모님에게도 인정받을까요?
"마지막 회에서 강태원 사장님이 (순금이가 만든) 김치부침개를 드시는 걸 보고 약간 희망이 보였어요."
-'로맨스 타운'에는 식모와 복권이 등장했어요. 그동안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소재인데다 후반부로 가면서 심리 추리극이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배우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작품이었을 것 같은데 '로맨스타운'을 선택했던 이유는?
"처음에는 '파스타' 작가님의 후속작이라고 해서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하고 선택했었는데 작품을 한 회 한 회 찍어가면서 작가님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계시다는 걸 느꼈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뜨악한 부분도 있지만 어차피 한 배를 탄 사람이니 작가님의 도전에 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찍었던 것 같아요."
-캐릭터가 완전히 이해되어야 연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순금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너무도 명료했어요. 누가봐도 순금이었으면 이랬을 것 같아서 무리 없었는데 중후반에 들어서며 당차고 당당한 순금이가 사랑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해되지 않아 갈등이 있었어요. 감독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어필도 했었고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강단있고 씩씩한 여자도 사랑 앞에서는 여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이어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도 배우의 몫인 것 같다"는 모범 답안을 내놓더니 "사실 드라마가 끝나고 한걸음 물러나서 보니 납득이 되더라"며 웃었다.
-캐릭터에 첫 눈에 반해야 한다고 한 적도 있죠. 순금에게도 반했나요?
"네. 순금이는 제 워너비 여성상이에요. 전 직선적이고 할 말 다하지만 뒷끝없고 쿨한 여자가 정말 좋아요. 순금이를 본 순간 너무 멋있다 싶었어요."
-그런 순금이와 유리 씨의 공통점이 많다던데….
"털털하고 여성스럽지 않은 점이 같아요. 사실 전 애교도 없는 편이에요. 순금은 보통은 잘 모르지만 진짜 친한 사람들만 아는 성유리와 닮은 점이 많았어요."
-용사장님(조성하)은 순금이에게 악바리라고 하죠. 유리 씨도?
"저도 겁 없고 깡 있는 편이에요. 순금이만큼은 아니지만. 하하."
그는 순금에게서 의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여자가 그렇게 의리있기 쉽지 않은데 순금이는 돈 앞에서도 사랑 앞에서도 의리를 지키잖아요. 지긋지긋한 아버지한테 까지도요. 그런 부분이 정말 멋있어 보였어요. 어떻게 보면 요즘 여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서 매력있고 사람들한테 사랑받은 것 같아요." ▶ "잘 우는 법? 눈물 신이라는 생각 자체를 잊어버리죠."
-순금은 술을 잘 마시죠. 유리 씨는?
"잘 못 마셔요. 술 맛을 잘 모르고요. 힘들고 지쳤을 때 술 마시면 위로된다고들 하는데 전 오히려 더 힘들어지죠. 하하. 근데 이 드라마를 하면서 술을 잘 마셨으면 이럴 때 연기를 더 맛깔스럽게 했을텐데라는 아쉬움은 있었어요. 술 마시면서 위로받는 느낌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럼 힘들 때 어떻게 위로받나요?
"사람들의 말에 많이 위로받는 편이고 신앙으로 극복하는 것도 커요. 아픔과 고난이 있어도 다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여태까지 경험상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별 일 아닌데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좋아해요. 드라마를 하면서도 제가 힘들어할 때 박지영 선배님께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잊고 있었는데 '아, 지나가는 거지?' 상기했어요."
-우는 장면이 많았고 잘 해낸 것 같아요.
"사실 눈물 신 찍으려고 하면 며칠 전부터 긴장돼요. 피곤하면 쉽지 않을뿐더러 예전에는 눈물 흐르는 게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진짜 눈물 흘리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냥 집중하는 것 같아요. 이 대사를 할 때 상대방의 마음은 어떨까 계속 생각하고요. 그러다 막상 촬영 들어가면 울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요. 지문에는 '운다'고 써있지만 눈물 한 방울이 흐를 수도 있고 그렁그렁 맺혀있기만 할 수도 있잖아요. 감정만 충분하면 시청자들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울어야한다는 생각 자체를 잊어버려요."
-19회 키스신이 인상적이었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사실 전 그 신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어요. 라면을 먹고 있다가 건우가 헤어지자고 하는데 이 상황에서 건우가 떠나는 게 이해되지 않는 거예요. 사랑한다면 싸워서 이겨야지 떠나버리고 나면 사랑이 아니라 도피 아닌가 싶고요. 게다가 순금은 헤어지자는 건우한테 수동적으로 대처했어요. 나는 이렇게 할 수 없다 뛰쳐나가던지 뺨을 한 대 때리던지 해야겠다고 감독님한테 투정도 많이 부렸죠. 그래서 수정된 게 방송으로 나간 장면이에요. 순금이가 나가려고 하면 건우가 확 돌려서 잡죠."
-작품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에요. 작품이 없는 기간에는 뭘 하면서 지내나요?
"배우는 걸 좋아해서 언어도 운동도 배워요. 영어 일어를 배우는데 전혀 느는 것 같진 않고 내가 뭔가를 배운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아요. 하하. 미술하는 친구가 있어서 미술관도 자주 가고요. 영화도 보고요."
성유리는 스스로 "지루하고 재미없게 산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일단 기도하고 강아지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밥을 먹어요. 일단 배가 든든해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요."
-작품이 끝날 때마다 연기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작품 적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작품 선택할 때는 겁이 많은 것 같아요. 모든 게 잘 맞아야 선택하지 하나라도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선뜻 선택하지 않게 돼요. 시간이 지나다보면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아쉬운 부분이 있는 작품 선택하기는 아깝고 그러다 보니 더 길어지고요."
-앞으로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어렸을 때 1,2년 씩 공백을 가졌던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지 않은 나이니까 웬만하면 빨리 좋은 작품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그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차기작을 하고 싶다고 했다.
"'태양을 삼켜라'를 찍고 나서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연기에 회의를 느꼈던 시기였어서 어떤 작품을 줘도 눈에 안 들어 왔어요. 놓쳐서 아쉬운 작품도 많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쉬어서 충전이 됐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다음 작품을 하고 싶어요. 아직까지 열정이 식지 않은 것 같아요. 개인적인 삶으로는 풀 수 없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작품에 들어가나요?
"일단 주제가 건강하고 명확한 작품이 좋고요. 캐릭터는 내가 충분히 사랑할 만한 캐릭터여야 해요. 작가님 감독님도 중요하고요. 그 외에도 이런 저런…. 하하" ▶ "과정이 즐겁고 아름답다면 성공한 것"
'로맨스 타운'에서 노순금은 100억짜리 복권에 당첨된다. 성유리에게 '인생의 복권'을 묻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연예계 데뷔를 꼽았다. 그러고는 "순금을 보면 복권에 당첨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복권에 당첨돼서 다행인 것 같나요?
"음…. 네. 지금은 만족해요."
-가수에서 연기자로 전환했죠. 회사에서 시켜서 연기를 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솔직히 뭘 해야할지 몰랐던 시기였어요. 내가 어느 쪽에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가수 말고 다른 일을 하라고 했으니까요. 매니저 오빠가 연기자 매니저를 오래 한 분이었는데 연기를 추천해 주면서 저랑 가장 잘 맞을 것 같아서 추천한다고 했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가수보다는 연기자가 더 어울릴만한 캐릭터라고 생각했었데요. 매니저 오빠 눈이 정확했던 것 같아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제가봐도 연기자가 더 맞는 것 같아요."
-요즘 아이돌들은 데뷔 전부터 연기 수업도 받지만 핑클 때는 그렇지 않았죠.
"작품이 결정되고 연기를 배워야했기 때문에 그 작품의 대사 대본을 가지고 연기 수업을 받았어요. 아무래도 기초가 부족했죠. 눈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게 시급했어요. 그 뒤로 연기 선생님을 두고 체계적으로 배우고 있어요."
-그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어요. 비난을 많이 받았는데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처음에는 오기였던 것 같아요. '내가 진짜 못하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오기요. 그러다 연기를 진짜 좋아하게 된 뒤로는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잘 하면서 즐기고 싶다는 욕심이요."
-연기가 좋다고 느꼈던 계기가 있나요?
"'어느 멋진 날'이라는 작품을 하면서요. 그 전에는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내 연기 내 대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멋진 날'은 감독님도 입봉작이었고 저도 오랜만의 작품이었고 공유 씨도 첫 주연작이었기 때문에 셋이 되게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우리 셋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무모했던 거죠. 한 신 한 신 찍는데 상의하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 전에는 만들어진 것에 제가 끼워 맞췄다면 이 드라마는 제가 만들어가는 게 조금씩 늘어가면서 나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구나.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구나를 처음 느끼게 되면서 매력을 느꼈어요."
-'로맨스 타운'은 어땠나요?
"선배님들의 든든함을 많이 느꼈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계셔도 존재만으로도 드라마를 꽉 채워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동안 시청률로 드라마 성공 실패를 봤다면 '로맨스 타운'으로 그 생각이 깨졌어요. 과정이 즐겁고 아름답다면 나는 성공한거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뭐가 그렇게 좋았나요?
"전에는 촬영장에서 말없고 스태프들과도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고… 벽을 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촬영장에서는 다가가려고 노력했고 다들 절 사랑해주셨고 믿어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시너지효과가 더 났던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부분보다 더 많은 부분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어요. 예전에 소지섭 씨와 드라마 찍었을 때 자기는 촬영장 나오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했었거든요. 대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 싶었는데 이번 드라마하면서 그런 걸 느낀 것 같아요."
-'로맨스 타운'은 노순금의 이야기였어요. 부담감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부담됐죠. 1회 초반 14분 까지는 순금이 혼자 나오는 장면이었어요. 작가님도 감독님도 촬영 들어가기 전에 걱정 많이 하셨어요. 1회인데, 경쟁작도 만만치 않은데 순금이 혼자 나오는 분량을 어떻게 해야할까 많이 고민했었는데 워낙 스토리가 탄탄했어요. 드라마 중후반으로 가면서 출연진 모두 주연이었던 것 같고요. 그러다보니 부담도 점점 줄었어요."
▶ "유리성 공주? 생긴대로 살래요."
-연기는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할 것이라고 자주 말하는 것 같아요. 목표가 구체적으로 뭔가요?
"모니터를 해보면 내가 이 장면을 어떻게 찍었지 싶을 때가 있어요. 나는 저 정도의 능력이 안 되는데 저건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찍을 수 있었구나 생각할 때가 있거든요. 그런 감흥을 어느 정도 느꼈을 때 그만두고 싶어요. 말로 표현하기에는 저만 느끼는 거라…. 아, 정말 잘했다 미련없이 충분히 했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 계속할 것 같아요."
-이번 드라마에서는 어느 장면에서 그런 감흥 느꼈나?
"아버지한테 차라리 아버지가 죽고 엄마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장면이 있어요. 저도 제가 그렇게까지 오열할 줄 몰랐어요. 슬프기도 하고 아버지한테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되나 걱정도 있었는데 막상 아버지 뒷모습을 보니까 너무 울컥하는 거예요. '아, 이건 내가 연기가 늘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 뒷모습이 울게 해주는구나' 싶었어요."
-이번 드라마를 통해 칭찬 많이 받았어요. 가장 뿌듯한 칭찬이 있었다면?
"순금이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되고 순금이가 울게 되면 나도 모르게 울게 됐다는 댓글보고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그동안 연기를 했다면 지금은 그냥 순금이로 살아가는 걸 시청자들도 느껴주시는 거니까요. 예전에는 성유리 성유리 그랬다면 요즘은 순금이 순금이 그러시는 걸 보면 좋아요. 밥 먹으러 갔을 때도 '어 순금이다' 하세요."
-연기에 점수를 준다면?
"51점이요. 가장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에요. 1회부터 다시 찍고 싶을 정도로요. 다 끝내놓고 보니 순금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겠는 거예요. 그래서 51점."
-욕심이 많았다는 뜻?
"찍으면 찍을수록 욕심이 늘어났던 것 같아요. 일단 순금이를, 작품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욕심이 있었죠."
-데뷔 13년째에요. 데뷔 초기 지금의 모습을 상상했었나요?
"사실 데뷔하기 전에는 제가 가수가 될 것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죠. 그냥 왠지 정해져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들어요."
-13년 후에는?
"일단 가정이 생겼을테고요. 여유와 연륜이 있는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김희애 선배님같이 그 나이가 되어도 아름답고 섹시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성유리는 그룹 핑클에서 막내이자 '화이트'였다. 인형같은 외모에 말 수도 적은 그를 보고 '유리성의 공주'라는 이들이 많았다.
"전에는 그런 이미지들을 깨려고 왈가닥 털털한 모습을 자주 보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번 작품하면서 감독님이 저한테 '생긴대로 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미지 깨고 독하게 연기하는 연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생긴대로 적당히 이성적인 배우가 될 것인지는 제 선택인 것 같아요. 저, 그냥 생긴대로 순리대로 살래요."
앞으로도 '유리성의 공주'로 살겠다는 말일까 살짝 걱정이 된 순간 호탕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이미지 말고, 사람들이 모르는 진짜 성유리로 살 거예요."
김아연 기자 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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