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칼럼]상실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이들 ‘천일의 약속’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16일 15시 07분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서연(수애)는 사랑과 삶, 모든 것을 잃는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서연(수애)는 사랑과 삶, 모든 것을 잃는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며칠 전 친한 친구가 밤 1시가 넘어 문자를 보냈다. "어머나, 니 생일 깜박했어. 나 수애병걸렸나봐." '수애병' 요즘 SBS '천일의 약속'의 인기를 반영하는 유행어다.

잊어버린다는 것. 없어지는 것. 죽는 것. 실존주의 심리치료에서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한 인간에게 존재했다 사라지는 모든 것, 즉 그 어떤 '상실'을 의미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역시 불안의 주된 두 가지 기원으로 어머니의 상실(분리와 개별화)과 성기의 상실(거세공포)을 들어 인간의 성장과 정신 병리를 설명하려 했다.

내 생일을 잊은 나의 '절친'은 십년 넘게 지켜온 우정에서 생일에 대한 기억을 상실함으로써 어쩌면 태어난 날을 축하하기보다는 남은 날들, 죽음을 기다리는 우리의 시간들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하나의 상실은 다른 하나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하는 걸까. 상담에서는 상실의 애도 과정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통합의 5단계로 본다. 이 과정은 상실을 경험하는 모두에게 적용되며 이를 잘 거치고 나면 새롭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한 남자의 사랑과 삶의 목표를 잃은 여자, 향기

'천일의 약속' 캐릭터들은 '김수현 드라마'답게 모두 개성 있다. 독한 언행으로 시청자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향기 엄마 오현아(이미숙 분)나, 배려심 많고 공감적인 지형의 어머니 강수정(김혜숙) 등. 일단 그들을 제쳐두고 주인공 3인의 공통점은 상실의 아픔을 겪고 다스리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남자를 나쁜 남자로 만드는 여자, 향기(정유미).

그녀는 오랫동안 해바라기 하던 한 남자를 잃었다. 결혼식 전날 이미 오래전부터 남자의 마음이 떠나 있었음을, 이제 그만 떠나고 싶은 그의 마음을 알게 된 향기의 반응은 조울증 환자처럼 오락가락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일관되게 지형을 나쁜 남자로 만든다. 큰 결심으로 그녀를 찾은 지형에게 화를 내고 안 된다고 떼를 쓰다가 결국 그의 입장을 고려해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녀의 마음은 울고 토하고 방안에 틀어박히는 행동으로 표현되고 그것을 본 가족들은 그녀의 말을 믿을 리가 없다. 그러다 진정이 된 향기는 그저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뜬금없이 전화를 하기도 하고 긴긴 문자메시지로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향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남기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분히 상대를 고려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녀는 아직 화가 난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타협을 시도하는 정도의 단계에 있는 것 같다.

▶안정적인 삶과 부모의 기대를 잃은 남자, 지형

지형(김래원)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연인 서연(수애)를 택하며 안정적인 삶을 잃는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지형(김래원)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연인 서연(수애)를 택하며 안정적인 삶을 잃는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두 여자를 울린, '나쁜 놈' 혹은 '우유부단한 놈'으로 불리는 지형(김래원)은 어떤가. 모든 것을 다 갖고 좌지우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그의 인생에서 어마어마한 것을 잃는다. 오랜 시간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해준 한 여자와 그를 믿고 지원해주는 어머니의 신뢰, 그리고 아들을 이용해 명예를 얻으려는 고약한 심보를 지녔지만 물질적으로 그를 지원해준 아버지까지.

그러나 이미 오랫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믿음을 상실했던 지형은 향기와의 파혼을 결심함으로써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 상담했던 한 여학생이 새로운 남자를 만나 좋아하게 되었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의 마음을 알게 된 어느 날,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한데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나간 기분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여주인공 서연은 선뜻 자신을 선택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가는 지형을 사랑하기는 했으나 사랑의 핵심이 되는 믿음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 여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행복한 남자인 것처럼, 두 여자를 울리는 나쁜 남자인 것처럼 보이는 지형은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동안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한 채 방황한 불쌍한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국면을 통해 안정적인 삶과 부모의 기대는 잃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을 부정하고 타협하며 우울한 상태를 겪어 왔기에 눈에 보이는 상실과 더불어 통합을 이루고 새롭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과 삶의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 서연

향기(정유미)는 결혼식 이틀 전 정혼자인 지형(김래원)에게서 버림받으며 상실을 겪는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향기(정유미)는 결혼식 이틀 전 정혼자인 지형(김래원)에게서 버림받으며 상실을 겪는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수애병의 진정한 주인공, 서연(수애)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녀가 기억을 잃는 병에 걸리고 그것을 부정하고 타협했다가 우울해지는 과정이 드라마 속에서 뚜렷하게 소개되고 있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보고 치매 진단을 받은 후에도 서연은 약 먹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사라지는 기억을 잡으려 발버둥친다.

서연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병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어떨까.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후에도 어느 정도는 이미 잃은 것처럼 살아오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 상황에서 그녀의 병은 깊어진다. 어쩌면 서연은 시작부터 가슴 아파야했던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죽이고 기억을 잃어가며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과 더불어 찾아온 병은 너무나 가혹하다. 사랑이 식어 서서히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 채로 떠나보내야 하는 그녀의 심정은 생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그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연은 원치 않는 결정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이별 통보를 받은 날 괜찮은 척 그를 보내고, 전화를 받지 않고 결국 전화번호를 바꿔버리는 억지스러운 행동 말이다.

우리는 맘에 없는 행동을 할 때 은연중에 그것이 잘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따라서 마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상대가 날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면 지형을 억지로 지우려 애쓰는 서연은 절대로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기억을 지워주는 치매란 병은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것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없게 된 그녀의 기막힌 운명 앞에서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다행히도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지형이 그녀 곁을 지킬 것 같다. 서연은 점점 기억을 잃고 죽어갈 테지만, 남아있는 삶 속에서 사랑을 찾고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성장을 이룰 것이다.

많은 상담이론에서 애도의 과정을 다룬다. 고통을 겪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상실'의 주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자녀들, 이별한 연인들, 배우자를 잃은 사람 등. 결국 관계는 끝없이 이어질 수 없으므로 '좋은 이별'을 위한 마음의 자세가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천일의 약속'의 세 주인공들이 앞으로 남은 회 동안 어떻게 이별하고 어떻게 상처를 치유해갈 것인지, 비로소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 기대된다.

이계정 상담심리 전문가 lisay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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