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마포구의 A증권사 지점. 펀드를 알아보러 왔다는 말에 상담 직원이 펀드 목록이 적힌 책자를 꺼냈다. 책자엔 수많은 회사의 펀드가 나열돼 있었다.
형광펜을 든 직원은 한 펀드에 밑줄을 그었다. 이 증권사의 계열 자산운용사가 만든 펀드였다. “저도 이 펀드 가입했어요. 워낙 좋은 펀드라서 자신 있게 추천해 드리는 겁니다.”
다른 상품을 물어보자 직원은 펀드 두 개를 추가로 추천했다. 역시 계열사 펀드였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직원은 15분간 추천 펀드의 장점을 강조했다. “주가가 지금보다 60% 이상 빠지지 않으면 돈 버시는 펀드예요….”
해당 펀드의 최근 수익률을 묻자 직원이 “미래가 중요하지 과거 수익률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확인해 보니 추천 펀드들의 최근 수익률은 좋지 않았다.
○ ‘계열사 펀드 밀어주기’ 여전
금융위원회가 이르면 4월부터 계열사 펀드 판매 비중을 50% 이하로 제한키로 하면서 막바지 ‘펀드 밀어주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밀어줄 수 있을 때 제 식구를 밀어주겠다는 것이다.
동아일보가 21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소재 13개 증권사와 7개 은행 등 20곳의 지점을 찾아 펀드를 추천받은 결과 계열사 펀드를 가장 먼저 또는 그 다음으로 추천한 지점이 14곳(70%)으로 나타났다.
가장 먼저 계열사 펀드를 소개한 지점은 10곳. 이 중 5곳은 두 번째도 계열사 펀드를 권했다. 계열사 펀드를 소개하면서 타사의 펀드와 수익률 등을 비교해준 지점은 11곳에 그쳤다.
계열사 펀드 팔기에 급급해 펀드의 특징과 수익률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곳도 많았다. 20곳 중 10곳은 금융투자상품에 가입할 때 거쳐야 할 ‘투자자 성향 분석’도 실시하지 않았다.
추천 펀드의 수익률이 좋았던 특정 기간만을 골라 설명하는 곳도 많았다. 펀드 설정 이후 3년 동안 수익률이 마이너스인데도 수익률이 좋았던 첫 6개월의 성과만 홍보하는 식이다.
여의도의 한 증권사 지점은 추천 펀드의 수익률을 묻자 “컴퓨터가 고장 나 수익률을 확인할 수 없다”는 황당한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 금융 당국 3월까지 대책 마련
계열사 상품 밀어주기는 특정 지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계열사 펀드를 취급하는 46개 회사 가운데 계열사 펀드의 판매 비중이 50%를 넘는 곳은 14곳에 달했다. 판매 비중이 60% 이상인 회사도 10곳이었다.
전문가들은 계열사 펀드 판매에 집중하는 것은 투자자가 아닌 판매사와 계열사의 이익만 챙기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고객보다 계열사 이익을 앞세워서는 투자문화가 성숙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연태훈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원은 “계열사 상품을 얼마나 많이 팔았느냐에 따라 직원이나 지점을 평가하다 보니 밀어주기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며 “판매사와 계열사의 성과는 좋아지겠지만 펀드 수익률이 나쁠 때 손실은 고스란히 투자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금융 당국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4월 이후 계열사 펀드의 판매 비중이 50%를 넘으면 영업을 정지시키는 등 다양한 제재 수단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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