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박이문 “인생의 답 찾아 평생 헤맸지만 결국 답이 없다는 답을 얻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4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

담백하고 맑은 표정의 박이문 선생. 그는 “인생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자이지만 매 순간 다가오던 삶의 위기를 극복하며 살려고 했던 점에서 긍정론자”라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담백하고 맑은 표정의 박이문 선생. 그는 “인생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자이지만 매 순간 다가오던 삶의 위기를 극복하며 살려고 했던 점에서 긍정론자”라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박이문 선생(84)은 평생을 ‘앎과 지식에 대한 추구’로만 일관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 시대 흔치 않은 진정한 학자상을 보여준다. 지난해 말 사회학자 정수복 선생은 박이문 평전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를 펴냈다.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의 평전은 이례적이다. 정 선생은 ‘왜 박이문인가?’라는 제목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박이문의 삶과 학문세계는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릴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삶의 의미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은 8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한 노학자의 삶에서 감동을 느끼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에 인용된 연세대 철학과 이승종 교수의 말도 울림이 크다. ‘참인간으로서의 박이문, 모든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고 진리의 추구라는 오직 한길만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걸어온 그의 고결한 인생은 이 땅의 모든 철학도에게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문화부 기자 시절부터 시작된 박 선생과의 인연은 지난 10여 년 동안 식사나 차담(茶談)을 나누며 이어져왔다. 기자가 본 박 선생의 삶은 이 교수의 말처럼 ‘청빈에 가까운 수도자적 삶’이었다. 무엇보다 매번 기자를 감동시킨 것은 그의 겸손과 호기심이었다. 선생은 묻기보다 듣기를 좋아했으며 때로 세상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을 말하는 기자에게 늘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환한 미소와 언어로 다독여주곤 했다.

대한민국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요즘, 80대 노철학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경기 고양시 일산 문촌마을, 그가 사는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을 때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며 문을 열어주었다. 옆에는 단아한 표정의 부인 유영숙 여사가 서 있었다.

박 선생은 한눈에 보기에도 몸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다. 2년 전 뇌경색을 앓은 이후 다소 회복은 되었지만 바깥 생활은 거의 못한다고 했다. 유 여사는 “귀가 어두워져 보청기 빼면 잘 못 알아들으신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타자도 못 치신다. TV 켜는 법, 토스터 사용하는 법도 잊어버리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철학 이야기만큼은 연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신다. 의사도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

“얼굴이 더 평화로워지셨다”고 하자 “편찮으신 뒤부터 오히려 마음 상태가 평화로우신 것 같다”고 부인은 다시 일러주었다. 박 선생에게 “하루 일상이 어떤지” 여쭙자 “늙은 부부가 하루 종일 같이 있지. TV 보고 산책하고…. 일산을 떠난 기억이 별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선생의 말투는 느릿했고 나직했으며 단답형으로 자주 끊어졌다. 이번 인터뷰는 그의 마음과 생각을 제일 잘 아는 부인의 부연 설명과 정 선생의 평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

―몸이 불편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인데…괜찮으세요.

“그저 그러려니 합니다. 지금도 써야 할 글이 많아서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철학도 정리할 게 아직 남아있고 시도 수필도 더 쓰고 싶은 게 있는데.”

―죽음이 싫거나 두렵지는 않으세요.

“두렵다기보다…아쉽지요. 아직도 구경할 것이 많은데.”

그가 말한 ‘구경’이란 표현에선 삶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초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해 온 노철학자의 생각이 묻어나는 단어였다.

몇 년 전 민음사에서 펴낸 그의 책 ‘아직 끝나지 않은 길’에 삽입된 ‘미리 써본 유서’라는 글에는 죽음에 대한 선생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추한 것도 많았지만 아름다운 것도 많았지요. 미운 것도 많았지만 예쁜 것도 많았지요. 가난하지만 힘껏 살았소. 짧았지만 오래 살았소. 오래 살았지만 꿈같은 시간이었소. 후회한들 무엇하랴. 힘이 닿는 데까지 살았다오. 이제 아주 나쁜 것도 좋소, 모든 게 좋소. 추한 것도 아름답소. 모든 게 아름답소. 후회도 소망도 없이. 아쉬움도 충만도 없이 그냥 담백하고 맑게 가라앉은 심정으로 모든 것과 조용히 화해한 심정이오.’

―남에게 폐가 되니 부고도 내지 말고 장례식도 번거롭다 쓰셨어요. 화장(火葬)해달라고도 하셨고요. 생각에 변함은 없으신가요.

“물론이죠. 근데 화장 생각은 좀 바꾸었어요. 세브란스병원에 시신 기증을 등록했거든요. 화장하면 그저 (내 몸을) 버리는 것이지만 시신 기증은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죠. 항상 몸에 시신 기증 카드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으면 금방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어 있어요.”

그는 총 15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작을 남긴 철학자이다. 500여 편의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며 수필이 고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미국 시먼스 칼리지(1970∼1991년) 포항공대(∼2000년), 연세대(∼2010년)에서 교수를 지냈지만 “뜬구름 잡는 강단철학은 경멸한다”며 평생 어느 단체에 속하지 않고 홀로 공부하고 썼다.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 대학교수 자리(이화여대 불문과)를 박차고 30대 초반인 1961년 프랑스로 혈혈단신 유학을 떠났지요. 왜 한국을 떠나셨나요.

“61년인데 그해 5·16쿠데타가 났지요. 계속 한국에서 살다가는 사람답게 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부의 유혹도 있을 것 같았고 대학에서 보직을 맡으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럭저럭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다 보면 공부는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했고. 도망치고 싶은 심리도 있었지요. 전쟁통에 서울대 불문과에 들어가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1957년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는데 성에 차지 않았어요. 돌이켜보면 허황되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을 모두 알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의 소르본대 불문학 박사학위논문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을 때 파리에 유학 중이던 일본 불문학자 하스미 시게히코는 책을 서점에서 접하고 저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동양인도 이런 논문을 쓸 수 있구나”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정수복 책).

―그래서 이제 근본적인 것에 대한 답을 찾으셨나요.

“평생 노력했지만 인생의 궁극적 의미 같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이 없다는 답을 알게 된 거죠. 사실 인생의 의미가 뭐냐 하는 물음은 성립이 안 됩니다. 어떤 면에선 그걸 찾으려는 노력조차 헛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의 의미’는 가능합니다.”

―그것은 뭔가요.

“각자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 자체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허무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매 순간 내게 다가오던 위기를 극복하면서 살려고 했다는 점에서 긍정론자라고 할 수 있지요.”

―좋은 대학(서울대 불문과)을 나오고 그 어렵다는 박사학위도 두 개(프랑스 문학박사, 미국 철학박사)나 따셨는데 부나 명예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어요. 후회는 없나요.

“누구나 그렇듯 모든 길을 다 걸어갈 수는 없지요. 나 역시 갈등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지적 탐구’라는 여정을 걸으며 가장 옳고 보람 있는 삶을 살려는 의지만은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앎을 추구하기에만도 시간이 너무 모자랐어요.”

1930년생인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을 고스란히 겪은 세대이다. 한국어를 포함해 일본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까지 5개 언어를 읽고 쓰는 데 문제가 없다.

미국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면서 노장(老莊)사상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는 그는 이에 관한 책도 몇 권 펴냈다.

―동서양의 철학을 두루 섭렵했지만 인생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無爲)의 삶을 살려는 노력, 삶에 대한 환상이나 착각에서 벗어나 도(道)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쪽으로 많이 기울었습니다.

“무위적 삶의 태도는 단순히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흐름에 따라 산다는 점에서 가장 실천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노장은 자연을 정복해서 우리 욕망에 굴복시키며 물질적 안위를 채우는 대신 바람처럼 물처럼 골짜기 냇물처럼 자연을 따라 살라고 가르치지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은 살아가기 위해 겪는 모든 고충과 비극을 슬픔이 아닌 하나의 희극으로 보라고 합니다. 어때요. 너무 멋지지 않나요.”

그가 소년처럼 맑은 얼굴로 기자에게 되물었다. 기자는 대답 대신 ‘존재 자체만으로도 울림이 되는 큰 어른이 있다면 박이문 선생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갈 길을 잃어 방황하는 청춘이 많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젊은 사람들한테 좋은 말 해달라고 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신도 없고…요즘 젊은 애들 참 안됐습니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지 않은가요. 우리나라처럼 ‘파이팅’ 같은 말을 자주 외치는 나라도 없어요. 계속 싸우라고, 가만히 있으면 빼앗긴다고 주변에서 외쳐대지요. 사는 모습들이 너무 힘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누가 지시하고 이끄는 대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면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 아닌가요. 뭐든지 강제와 강요는 안 됩니다.”

―인생에 답이 없다고 하면 너무 허무한 거 아닌가요.

“진정한 허무주의자라면 태연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모든 것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만이 절망하지 않습니다.”

알 듯 모를 듯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였지만 “인생과 진리에 답이 있다”며 환상과 거짓을 파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상이어서 그런지 “답이 없다”는 그의 말이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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