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현장]이영란 물체극 「밀가루는 밀의 가루이다」

  • 입력 1996년 11월 14일 20시 19분


「金順德기자」 밀가루를 보고 보통 사람들은 먹을 것을 떠올린다. 수제비 칼국수 빵 등…. 그러나 배우이자 무대미술가인 이영란씨(30)는 밀가루를 상대역을 맡은 배우처럼 대한다. 이씨와 만난 밀가루는 그림이 되고, 반죽상태에서 옷이 됐다가 얼굴에 들러붙어 탈바가지도 된다. 13일 서울 동숭동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벌어진 이영란씨의 물체극 「밀가루는 밀의 가루이다」 현장이다. 누런 종이가 깔린 무대 위에는 밀가루가 조그만 동산처럼 쌓여 있다. 무대밖에서 달려나온 이씨는 밀가루를 발견하고는 멈칫 선다. 무대 주변을 빙빙 도는 이씨의 모습은 같이 놀아볼까 말까 망설이는 아이같다. 조심스레 다가가 밀가루를 만져보고 입으로 불어보고 손가락에 찍어 맛을 본 그는 드디어 결심한 듯 밀가루로 커다란 나무와 집을 그리기 시작한다. 밀가루더미 속에 감춰졌던 물을 만나자 반죽을 해서 오리 뱀 두더지를 만들고 이어 밀가루를 이겨 얼굴에 붙인 뒤 잘 떨어지지 않자 괴롭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어떤 물체이든 깊게 교감을 나누면 어떤 철학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특히 밀가루는 사랑을 주면 반응을 하는, 정말 사람과 같은 존재죠』 이 연극에서 밀가루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호기심끝에 관계를 맺고, 그것이 지나치거나 외부 조건이 개입되면 구속이 되어 떼어버리려고 몸부림치는 삶의 양상을 표현한다고 이씨는 설명했다. 첼로 선율속에 말없이 진행되는 이 작품은 이씨가 얼굴에서 떼어낸 반죽으로 새를 한마리 만들어 날려보내는 것으로 끝맺는다. 공연을 지켜보던 극단 자유의 이병복 대표는 『이 세상에서 한판 놀다가 새 한마리 남겨놓고 떠나가는 게 인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며 밀의 가루에 불과한 물체를 통해 이처럼 다양한 세계를 보인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성신여대 조소과를 졸업한 이씨는 프랑스 필립 장티 국제인형학교에서 공부한 뒤 93,94년 파리와 96년 스위스에서 밀가루 시리즈 공연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공연은 17일까지 평일 오후7시반 토일 오후4시 7시. ▼ 02―741―3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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