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의 한국 현대사를 대쪽같이 살았던 민족문학의 큰별 하나가 떨어졌다.
28일 노환으로 별세한 樂山 金廷漢선생은 20대 청년시절부터 米壽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평생을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이 일치되는 드문 삶을 산 문인이자 교육자다.
1908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난 樂山은 동래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 동경제일외국어학원을 거쳐 와세다대학 부속 제1고등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32년 방학때 농촌 순회강연중 梁山농민봉기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했다.
문단에 정식 데뷔한 것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寺下村」이 당선된 1936년이지만 양산사건 직후 마름과 농민간의 갈등을 다룬 「그물」을 문예지에 발표하는 등 30년대초부터 작품을 썼다.
그러나 40년 일제의 검열이 극성스러워지고 민족지들이 잇따라 폐간하자 절필, 66년에 가서야 「모래톱 이야기」로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樂山은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농촌사회의 현실을 현장속에서 깊이 투시했던 작가중 하나로 꼽힌다.
초기에는 「사하촌」「옥심이」등 식민지시대 농민문학의 전범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썼으며 오랜 침묵뒤 다시 붓을 든 66년 이후에는 낙동강 주변의 가난한 농민들을 통해 민족적 현실의 모순을 신랄하게 파헤치면서 민중속에 잠재된 건강한 생명성을 추구, 농촌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세계를 보면, 일제때 토착지주와 사찰의 수탈을 겪어야 했던 소작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그린 「사하촌」에서부터 80년대 발표작 「슬픈 해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기간에 쓰여진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현실의 모순을 정확히 짚어내는 냉철하고 올곧은 정신이다.
원로작가는 물론 웬만한 중견작가도 다투어 전집을 내는 게 최근의 문단 풍토지만 樂山은 한사코 전집 내는 것을 거부,94년 「시와 사회사」에서 대표작품선을 내는데 그쳤다.
또 문단에 데뷔한지 꼭 60년이 되는 올해도 얼마전 부산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요산 문학인생 60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모임을 가졌을 정도.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된다.그것은 사람이 갈길이 아니다』
" 71년 발표한 소설 「山居族」에 나오는 것으로 동료문인들이 부산시내 성지골 수원지 녹지대에 78년 세운 요산 김정한 문학비에 새겨진 글귀가 그의 문학과 삶을 그대로 대변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