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살 난 우리 아이는 다른 것은 몰라도 존대말을 아주 잘한다. 내가 아무리 교육학자라지만 그런 것을 일부러 가르친 것은 물론 아니다. 단지 환경이 그렇게 되어 쉽게 배우고 익혔을 뿐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우리 부부와 돌도 채 못된 우리 아이는 3년 반 넘도록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우리 아이는 자연스레 엄마가 시부모께 하는 극존칭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께만 존대를 하고 우리에게는 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다 아이가 다섯살 때 분가를 했는데, 부모와 자기만 따로 살게 되자 어떻게그런생각을했는지 우리에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쑥스럽게 아이자랑을 한 꼴이 되었지만 말이나 행동은 이렇게 자연스레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하도 세상이 험악하고 사람관계가 살벌하다 보니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존대를 하기로 규정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것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 말들이 많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것이 규정으로 될 일인가. 또 그 규정을 지키기엔 우리 교육사정이 너무 나쁘다. 한 반에 40, 50명씩 몰아넣고 가뜩이나 저만 알고 자라는 아이들. 시끌벅적한데 존대말로 부탁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겠는가. 집에서는 마구잡이로 막돼먹은 말을 일삼는 부모들 아래 자라는 아이들이 학교에서만 존대말을 쓴다고 그것이 제 것이 될까. 이런 일들은 처음부터 잘 생각하고 차근차근 풀어야 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굳이 존대말을 강요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바글대는 교실에서, 획일적인 가르침만 있는 학교에서 강요된 존대말은 오히려 말만 앞서고 행동은 따르지 않는 요즘 세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작용을 할 지 모른다는 우려는 나만의 기우일까. 일찍이 방정환 선생은 어린 사람들도 어른과 같이 사람으로 모시고 대접하자고 어린 분이라는 존대말의 뜻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쓰셨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어린 분들을 사람으로 모시고 대접하기보다는 부모와 나라의 욕심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삼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존대말을 쓰자는 주장을 놓고 떠들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 수 있는 삶터로 학교를 만들어 주는 일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또 학교 뿐 아니라 집에서도 학원가라, 숙제해라가 아니라 「평안하고 튼튼하게 지내십니까」 하고 어린이 존재 자체를 모시고 대접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정 유 성<서강대교수·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