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길의 시내버스는 무겁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등짐들 탓이다. 한결같이 크고 무거운 등가방들이 아이들의 어깨와 버스를 내리누르고 있는 까닭이다. 퀭한 눈들, 푸석푸석한 얼굴들이 고단함의 무게를 더해준다. 대학입시철인 요즘은 등짐의 무게는 덜해진 느낌이지만 그들의 어깨는 더욱 늘어진 것처럼 보인다. 등짐의 무게에 가위눌린 채 「당분간」이란 미명 아래 시와 철학, 사랑과 자유의 밖에서 사는 게 아닌 듯 살아내야 하는 젊은 영혼들의 일그러진 표정은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우수를 느끼게 한다.
유예된 시간들을 얼마나 더 살아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유치원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대학 입학 때까지 모든 시간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쩌면 유예된 시간들이다. 통과제의의 시간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너무나 가혹하고 길다. 통과제의를 거치면 고양된 제 시간을 보상처럼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네 사회적 삶이라는 게 어디 꼭 그렇던가. 혹 보상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단 일회 공연에 불과한 삶의 어떤 시기에 뻥 뚤린 불연속의 공간이 어둡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계 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런 현실에서 자기 영혼의 시간을 돌려달라고, 자기 시간을 제 영혼이 움직이는대로 살아가겠다고 섬세하면서도 다부지게 말하는 「아름다운 아이들」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반성적 사유를 요구한다. 『이제 준비 시간은 없다. 아니 본래부터 그런 시간은 없었다. 몇 살까지가 어린애고, 언제까지가 준비 기간이란 말이냐.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일뿐이고, 내가 머무르는 데가 나의 집이며, 방황은 하더라도 그게 바로 내 삶이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바로 최시한의 연작소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목소리다.
다섯 편의 연작으로 꾸며진 이 소설에서 아이들은 금지와 경쟁, 적자생존의 원리가 포괄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교육 현실에 대해 사려깊은 목소리로 반성을 촉구한다. 국화빵이 되기를 거부하고 어두운 현실에서 자기 영혼의 길을 내려고 방황하고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학교와 교육,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많은 문제들이 다양한 코드로 성찰된다. 뒷부문에서 학교에서 쫓겨난 윤수가 자유롭고 서로 존중하면서 공부하는 「두레 학교」를 찾아가겠다는 대목은 특히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이 소설은 참 교과서가 드문 시대의 교육의 교과서다. 청소년기의 형성과 성장의 나침반이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읽고 대화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이있는 고민과 지혜를 나누게 하는 의미있는 소설이다. 「아름다운 아이들」의 목소리가 큰 울림으로 확산될수록 우리는 아름다운 사회, 가치있는 인간적인 사회를 꿈꾸고 실천할 수 있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여. 제 목소리를 높여라. 무거운 등짐에 눌리지 말고 크게 기지개를 펴라. 영혼의 길을 스스로 열어가라.
우 찬 제(건양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