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작가 허련순의「바람꽃」-깨진「코리안 드림」절규

  • 입력 1996년 12월 4일 20시 10분


「鄭恩玲기자」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한 연변 조선족동포 문제가 연일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취업 시켜주겠다』는 한국인동포의 말에 속아 평생을 일해도 다 못갚을 빚더미에 올라앉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병으로 숨진 사람, 빚쟁이를 피해 부모자식이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속출하고 있다는 실상이 알려지고 있다. 한중수교 직후만해도 조선족동포들에게 「꿈의 신세계」로 비쳤던 한국의 모습이 지금은 어떻게 그려질까. 연길태생의 여성작가 허련순씨(42)가 최근 국내에서 발표한 「바람꽃」(범우사 간)은 조선족동포의 목소리로 타국보다 더 매서운 조국인심을 고발하고 있다. 95년 흑룡강신문사 신춘문예당선작인 「바람꽃」은 지난 7월 연변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된 뒤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었다. 「바람꽃」의 등장인물들은 「운좋게 사기당하지 않고」 한국땅을 밟은 조선족동포들. 그러나 『조국에서 한몫잡아 새삶을 시작하겠다』던 그들의 꿈은 서울 도착직후부터 무참히 허물어진다. 작중화자인 홍지하는 연변에서 신문사기자로도 활동했던 중견작가. 일제때 강제징집돼 중국에서 눈을 감은 아버지를 고향땅에 묻기 위해 아버지의 뼈를 안고 한국땅을 밟은 지하는 도착하자마자 고국에서 일하다 중상을 입은 죽마고우 최인규의 사고소식을 듣는다. 인규와 부인 지혜경은 가난 때문에 변변히 치료도 못하고 외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뒤 『원수같은 돈을 벌겠다』며 한국으로 떠났던 것. 인규의 회사측에서는 「본인과실」이라며 치료비지급을 거부하고 부인 혜경은 남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자기회사 사장의 「씨받이」가 된다. 『아버지의 가족을 찾겠다』는 지하의 뜻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신만고끝에 이복형과 아버지의 첫부인을 찾지만 조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지하가 가로챌까봐 서울의 가족들은 끝까지 「핏줄확인」을 거부한다. 한편 폐결핵을 앓고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혜경은 사장이 임신중절을 종용하자 투신자살하고 남편인 인규도 「아내의 목숨값」으로 받은 돈을 지하에게 남긴 뒤 자살한다. 지하에게 남긴 유서에서 인규는 「사람은 재물에 죽고 새는 먹이때문에 죽는다」며 「너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울부짖는다. 소설속 조선족동포들의 절규는 글을 읽는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이용해 조선족동포의 여권을 빼앗아두고 저임금을 강요하는 악덕업주, 단속에 걸려 경찰에 잡혔다가도 뇌물만 찔러주면 나올 수 있는 법집행, 조선족이라면 유부녀라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남자들의 파렴치가 한국사회의 부도덕성을 비추는 거울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86년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 허씨는 91년 한국에서 펴낸 첫 작품집 「사내많은 여인」(동아일보 간)의 서문에서 『조선민족으로 중국에 살면서도 우리 민족의 사명감만은 꿈에도 잊을 수 없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5년이 흐른 96년 허씨는 「바람꽃」의 서문을 통해 『나는 두 세계중의 어느 한곳에도 머무르지 못한채 끊임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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