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두뇌 속에는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이 통째로 들어있는 듯하다. 그 해박한 지식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탄생하는 그의 다양한 글쓰기들은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웬만큼 교양을 갖춘 독자라도 기가 질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을 비롯한 그의 글들은 종종 수많은 참조들을 요구하고 독자의 능동적인 읽기(그의 표현에 의하자면 해석적 협력)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세번째 소설 「전날의 섬」(열린책들 펴냄)도 어김없이 독자들을 지적 모험의 세계로 이끈다. 남태평양에서 조난을 당하여 경도 180도 지점에 정박해 있던 어느 난파선에 도달한 이탈리아 귀족 청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바로 눈앞에 보이지만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섬은 경도 180도 너머에 있으며 따라서 시간적으로는 「어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과거의 현존을 마주보고 있는 주인공 로베르토의 정신적 여행은 존재의 근원을 향한 영혼의 편력이 된다.
버림받은 난파선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로베르토는 사랑하던 여인에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편지를 쓰고,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소설적으로 구성해 보기도 한다. 심지어 허구적인 인물과 사실까지 곁들여 꾸며낸 그의 이야기는 바로 난파선의 현실과 뒤섞인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고,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이야기속에다 자신을 투영하려는 로베르토의 노력은 존재의 절망적인 몸부림이다. 무엇보다 자기 존재를 확인해줄 「타자(他者)」의 결핍 상태에서 그가 써내리는 기록들은 곧바로 존재 자체의 표현이 된다.
또한 17세기라는 역사적 배경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고 있다. 17세기는 절정기에 이른 르네상스 정신의 결과로 다양한 과학 문명과 새로운 발견들이 폭발하던 시기이며 본격적인 근대의 시작을 예고하던 때이다.
과학 문명과 그에 뒤따른 정신의 변화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서사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의 첫소설 「장미의 이름」이 14세기, 그러니까 중세가 무너지던 시기를 다루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과학적 발명품들에 대한 장난기 어린 묘사와 설명, 카스파르 신부와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쟁들도 그러하다. 중세학자이기도 한 에코는 중세와의 대비를 통하여 현대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듯하다.
세계적인 기호학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에코는 「전날의 섬」에서도 중층적인 의미의 그물들을 펼쳐놓고 있다. 탁월한 언어 유희를 통해 한 조난자의 기록을 흥미로운 소설로 엮어내면서 그는 시간을 초월한 정신의 여행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하지만 그의 언어 또는 기호 게임은 단순한 지적 유희를 넘어서서 우리의 영혼 내부로 깊숙하게 파고 든다.
김 운 찬 <대구효성가톨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