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세월따라 변한 호칭

  • 입력 1996년 12월 15일 20시 14분


나에게는 아버지가 지어주신 영실이란 이름이 있다. 출중한 재능으로 충만하라는 사랑스러운 여자이름이다. 그래서 기나긴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에 남들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나는 남모르는 자부심을 가슴 뿌듯이 느끼곤 했다. 그런데 어른이 다 된 다음에는 자랑스러운 이름이지만 영실이라고 곧이 곧대로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쑥스러운 생각이 들곤 했다. 결혼하여 시가에 발을 들여놓으니 시어머님은 내 이름이 영실이란 걸 아시면서도 언제나 「새아기」라고 정답게 불러주셨다. 이럴 때마다 나는 영실이란 본 이름보다 더없이 포근하고 친근한 감을 마음속으로 따스하게 느끼곤 했다. 결혼 2년후 딸을 낳았다. 시아버님이 손녀이름을 옥녀라 지어주셨다. 그런데 이때부터 시어머님의 나에 대한 호칭이 달라지실 줄이야. 「새아기」는 사라지고 「옥녀에미」로 변했다. 이 새로운 호칭 때문인지 「나도 이젠 애어머니로서 정말 어른이 됐다」는 생각에 모든 언행에서 어른답게 처신하기 위해 자신을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년에 나는 외손자를 보았다. 딸 옥녀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애는 철호란 이름을 가졌는데 뒤따라 시어머니인 나에 대한 호칭도 어느새 「철호할미」로 또 바뀌었다. 처음 들을 때는 할미란 호칭에 어딘가 어색한 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했고 또 명실이 부합되는 할머니가 아닌가 생각하니 그 호칭은 더없이 정중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할머니로서 처신해야 할 많은 일들을 머리 속에 생각하니 두 어깨가 더 무거워짐을 깨닫게 됐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한 나의 이름. 이렇게 불러주신 시어머님은 뭇사람들 앞에서 무언중 늘 나를 존대했고 이끌어주셨으며 나 자신도 그러는 중에 예의법도에 맞는 인간의 참된 삶을 엮어 왔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내 딸에게도 「옥녀」란 이름 대신 「철이에미」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며 여자의 이름은 그 임무가 변하듯이 세월따라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김 영 실(경기 안산시 원곡1동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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