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밤 방영된 KBS 「역사추리」와 EBS 「역사 속으로의 여행」은 토정 이지함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관심이 가는 대목은 동아일보 7일자 보도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점복서로 오늘날에도 애용되는 「토정비결」이 토정 이지함의 저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이었다.
「주역」에 능통한 이지함의 학문으로 보아 「토정비결」은 수준미달이라든지 「토정집」 등 이지함 관련 문헌 어디에도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이 없다든지 하는 의견이 근거로 제시됐다.
또 19세기에 와서 유행한 「토정비결」을 16세기 사람인 이지함의 저작으로 본다면 그 시차가 너무 크다는 지적도 있었다. 결국 토정비결을 지은 무명인이 서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지함의 호를 빌려 세상에 유포시켰으리라는 추리였다.
필자는 지난 86년 「해동유요」(海東遺謠)라는 시가집을 발굴해 학계에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세로 23㎝, 가로 14.8㎝의 한지에 가사 35편과 각종 한시를 붓으로 베낀 1백64쪽짜리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 시가집의 편저자가 「土亭(토정)」이라고 서명돼 있었기에 필자도 처음에는 이지함을 연상하고 긴장했었다. 하지만 수록된 작품의 태반이 이지함 사후에 태어난 인물들의 작품이어서 여기 서명된 토정은 이지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문제의 토정이란 호를 가진 인물이 누구인지 그 정체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밝혀낸 내용은 그가 18세기에 살았던 경기도 강화 사람이며 가사를 손수 지은 문인선비라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 아닌 토정, 즉 「해동유요」의 저자인 토정일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해볼 수 있겠다.
우선 18세기 사람이었으므로 점복서를 지었다면 당대의 문화유통 속도로 보아 19세기부터 유행했으리란 추측은 적절하다.
둘째, 강화도는 당시 이단시되던 양명학이 뿌리내릴 정도로 주자학적 정통성에 구애를 덜 받는 학문적 풍토를 가진 지역이었다. 따라서 주역을 대담하게 축약해 고쳐 쓴 점복서를 펴내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셋째, 가사 한시 등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주역을 세속화한 문학적 내용을 시문으로 창작하는데 걸림이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해동유요」를 펴낸 토정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토정비결」의 저자를 밝혀는 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이 혜 화<경기 일산동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