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빠르망」 엇갈린 인연-감칠맛나는 영상 돋보여

  • 입력 1997년 3월 6일 07시 42분


[박원재 기자] 프랑스 영화가 비칠거리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다. 한때 알랭 들롱, 장 폴 벨몽도와 같은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던 프랑스 영화는 80년대 이후 미국 할리우드의 아이디어와 자본력에 밀리고 말았다. 90년대 들어 한국에서 성공한 프랑스 작품은 장 르노가 주연한 「레옹」을 꼽을 수 있을 정도. 소수 마니아는 여전히 프랑스 아트영화의 그윽한 향취에 빠져 있지만 두세번씩 실망해버린 대다수 관객들은 여간해서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이달 중순 선보일 「라빠르망」(질 미무니 감독)은 프랑스 영화에 대한 실망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할 만큼 감각적이다. 카메라는 빠르게 돌아가고 상황 설정이나 내용전개도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다. 프랑스어 대사만 없으면 할리우드 오락물을 보는 느낌마저 들 정도. 등장인물의 패션과 화면의 색채감은 CF를 연상시키듯 현란하면서도 강렬하지만 영화 중간중간엔 프랑스문화 특유의 철학적인 분위기도 묻어난다. 제목 라빠르망(l'appartement·아파트)이 암시하듯 영화는 파리의 아파트를 무대로 청춘남녀의 엇갈린 사랑과 인연을 다루고 있다.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재회의 약속에 설레이다 다시 어긋나고…. 결말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상투적인 러브스토리지만 「라빠르망」은 우중충한 파리 뒷골목을 세련된 영상으로 비춰가면서 감칠맛나게 풀어간다. 두 남자 막스(뱅상 카셀) 뤼시엥(장 필립 에코피)과 두 여자 리자(모니카 벨루치) 알리스(로만 브링거). 막스와 리자는 2년전 과거의 연인이며 뤼시엥과 알리스는 현재 사랑하는 사이. 또 막스와 뤼시엥, 리자와 알리스는 평소 고민을 털어놓는 절친한 친구지만 상대방 파트너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드라마의 변수는 알리스가 리자의 애인이었던 막스를 짝사랑한다는 점. 막스와 리자가 상봉하려는 대목에서는 어김없이 알리스가 끼여들어 「훼방꾼」 노릇을 하고 주인공 4명은 사랑 숨바꼭질의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통속적 잣대로 보자면 알리스가 「악역」으로 몰릴 법한 상황이지만 영화가 끝날 즈음 관객은 오히려 그녀의 가슴앓이에 공감케 된다. 모든 비밀이 고스란히 밝혀진 후반부 막스의 추궁을 받은 알리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누군가를 먼 발치에서 사랑해야 하는 이의 아픔을 아느냐』고 부르짖는 모습이 압권이다. 시사회에서 20대 초반 여성관객들은 영화속 슬픈 사랑에 푹 젖어든듯 눈시울을 적시는 이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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