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번즈 外 지음/소나무 펴냄
역사학자인 랑케에 의하면 역사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과거를 복원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랑케의 사관은 상당수의 역사학자들로부터 거센 비판과 도전을 받게 된다. 가령 헤이든 화이트 같은 학자는 역사서술이란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며 문학적인 상상력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번즈의 「서양문명의 역사」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번즈는 1941년에 초판을 내면서 벌써 역사 서술이 역사적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정치 사상 제도 경제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해 재구성하는 문명사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서양문명의 역사는 번즈의 손을 거치면서 하나의 고급스런 「이야기」로 바뀌어 진다. 역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역사는 그것을 서술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논리가 우리의 인식의 틀을 지배하는 시대에 랑케가 했던 바와 같이 과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것일지 모른다. 역사는 인간의 삶의 제반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생성되는 생물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는 그 생물체를 얼마나 진실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독자는 독자대로 그것을 토대로 역사의 줄기를 잡아가야 한다. 인류역사가 진행되면서 역사가 다시 쓰여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이야기(담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도 영원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나 사관, 혹은 철학에 따라 바뀌는 이야기다. 그래서 번즈의 후학들인 로버트 러너와 스탠디시 미첨이 1977년 이래 원래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고 필요한 것은 보완하는 개정작업을 해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서양문명의 역사를 탁월하고 조리있게 서술한 번즈의 저서일망정 그들은 그것을 미완의 것으로 간주하고 개정판을 낼 때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일반화된 학문적 경향을 반영하고자 했다.
「서양문명의 역사」는 인간사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역사보다 더 나은 지식의 원천은 없을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역사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다. 저자(들)의 휴머니즘과 진보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번즈의 저서는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왕철 (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