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 기자] 「영화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세상」이 극장가는 관객의 발목을 붙잡는다. 만성적 불황에 시달려 온 시내 개봉관들은 「한보 돌풍」에 이어 「김현철 태풍」까지 엄습하자 망연자실, 흥행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접었다.
지난 주말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이 모여 있는 종로3가는 말 그대로 썰렁한 분위기. 한국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서울) 「패자 부활전」(피카디리) 「똑바로 살아라」(단성사) 포스터가 관객을 손짓하지만 매표 열기는 좀처럼 달아오르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암표상을 언제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허탈해 했다.
이들 영화가 주말 이틀간 서울 개봉관에서 끌어모은 관객은 각각 1만∼2만명선에 불과.
을지로 명보극장도 사정은 마찬가지. 화산폭발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오락물 「단테스 피크」가 근근이 매진 횟수를 이어갔을 뿐 나머지 수입영화들은 기를 못폈다.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화한 극장가 침체는 올들어 회생불능 지경에 도달한 느낌. 올해 선보인 10편 안팎의 한국영화 가운데 이익을 낸 작품은 한편도 없다. 작품성을 인정받은 「초록 물고기」와 섹스 코미디를 표방한 「미스터 콘돔」이 가까스로 제작비를 건졌을 뿐이다.
수입영화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 「제리 맥과이어」와 「에비타」가 설연휴 특수에 힘입어 20만∼30만명을 끌어모았지만 예년 흥행작에 비하면 대단할 것 없는 기록이다.
영화계가 꼽는 극장가 불황의 결정적 이유는 단연 뒤숭숭한 정치 사회 분위기. 신문과 TV 뉴스가 「영화 뺨치게」 재미있다 보니 관객이 스크린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장년 가장의 씀씀이가 줄어들면서 주관객층인 20대초반 젊은이들의 주머니가 얄팍해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더구나 한보관련 청문회의 TV 중계가 확정되자 4월에 개봉스케줄이 잡혀 있는 영화사측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시네워크의 서경석사장은 『지금이야말로 한국영화 산업의 최대위기』라며 『청문회 다음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올해 흥행은 사실상 물건너 간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