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균영씨 유고집「나뭇잎들은…」 출간

  • 입력 1997년 4월 8일 08시 01분


작가 이균영이 지난해 11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마흔넷의 나이에 숨졌을 때 문인들은 역사학자(동덕여대 교수)이기도 했던 고인이 오랜 창작 공백기를 딛고 문학으로 돌아오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학문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나를 다시 문학으로 이끌고 있다』 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바람과 도시」로 당선, 데뷔한 그는 84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후 86년부터는 역사학에만 몰두, 학술지 「역사비평」을 만들고 단재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초만을 매만지고 살기에는 다스릴 수 없는 낭만적 열정을 갖고 있었다. 10년 공백을 깨고 95년 발표했던 소설이 「노자와 장자의 나라」, 그리고 몇편의 중단편들. 그의 문학적 열정과 천재성이 영원히 흙속에 묻혀버려야만 하는가. 그러나 유족들은 그가 숨지기 직전까지 품에 안고 있던 가방 속에서 육필의 유작을 발견한다. 얼음 골짜기, 「빙곡(氷谷)」이 그것이다.이씨의부인박규원씨(전 부산대교수)는 이를 유작집에 묶어 펴내기로 했다. 이번주 민음사에서 나오는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가 그것이다. 극히 가는 볼펜으로 작성한 「빙곡」의 육필원고는 A4용지(앞면)16장을 빽빽히 채우고 있다. 2백자원고지 1천2백여장 분량이니 A4용지 한장당 원고지 75장. 편집을 진행했던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너무도 불가사의한 일이어서 처음에는 이승에 살았던 사람의 글씨라고 믿어지지 않았다』며 『인간 정신의 정밀함과 집요한 창작열을 보여주는 표본』이라고 말했다. 「빙곡」은 산촌마을, 해방공간과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했다. 살육의 시절 좌우익 어느쪽으로부터도 미움받지 않았던 좌익 인본주의자가 겪은 인생의 부침(浮沈)을 통해 파란 많은 우리 현대사를 함축했다. 고인의 탁월한 역사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글이다. 부인 박규원씨는 『그는 완벽한 구상을 마친 다음에야 집필을 시작하곤 했다』며 『이 글 역시 한달여만에 쓰신 것』이라 말했다. 『늘 깨끗한 작은 방, 자개상 앞에 앉아 작디작은 글씨로 원고를 쓰고는 저와 나누어 정서하곤 했지요. 역사학 원고는 컴퓨터로 치셔도 소설들은 늘상 펜으로만 쓰셨어요』 중편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에는 봄비를 맞으며 야간운행에 나서는 초로의 독신 기관사가 나온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한번 스친 첫사랑을 못잊어 육순을 바라보는나이에도눈시울을적셔가며 옛 기억을 더듬는 순애보. 「흐르는 것은 시간이었다. 멀고 가까운 불빛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빛나는 것… 별, 어린시절의 고향, 청춘, 아내(…)나뭇잎들 사이에서 불빛이 잘게 부서져 빛을 내고 있다.(…)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종착역에 도착한 기관사는 인근의 저탄장을 바라본다. 「저 산처럼 쌓인 석탄더미(…)어두운 땅속에 또 수천 수억만년, 「한번 불꽃을 이룰 희망」에 눈을 빛내듯 그 표면엔 불빛이 빛나고 있다(…)」 이균영은 살아 있을 적에 산속에서 동식물을 껴안고 가꿔온 개척자의 일생을 대하소설로 쓰고자 했다. 그는 지금 그 글의 배경이 돼도 좋을 강원도 산골짜기의 양지 바른 무덤에 고요히 누워 있다. 〈권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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