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변대의 崔洪彬교수는 11일 서울대 인문대 한국문화연구소주최로 열린 제66회 학술발표회에서 「1930∼40년대 在滿韓人 항일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崔교수는 이 논문에서 "재만한인의 항일투쟁 주도세력은 1930년을 기준으로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 계열로 전환됐다"면서 "투쟁슬로건도 `한민족의 독립을 위하여'에서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하여'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당시의 재만한인 항일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진행됐고 투쟁형식은 무장투쟁이었으며 조직형식은 中-韓 연합부대였다는 것. 이는 1925년 `삼시협정'을 계기로 한민족에 대한 만주군벌들의 박해와 착취가 강화됐고 1930년에는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중국공산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올린 중국혁명과 밀착됐기 때문이었다는게 崔교수의 분석이다.
그러나 한인들은 항일투쟁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崔교수는 설명했다. 중국공산당의 항일 호소에 따라 만주에 세워진 유격대의 창시자는 대부분 한인들이었고 東滿 4개현의 유격대원중 한인이 90%, 南滿 유격대 2백30명중 한인이 80여명에 이르렀다는 것. 또 이 과정에서 신춘 김일성 방상범 양림 이홍 최석천 허형식 등은 걸출한 유격대 지도자로 부상했다고 崔교수는 말했다.
특히 1936년에 창설돼 일본군과 1천8백90차례의 전투를 벌인 동북항일연군에서 한인들은 주력부대로서 맹위를 떨쳤다는 것이다.
崔교수는 "항일투쟁에 대한 사학계의 입장도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라면서 "남북의 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는 항일운동에 대한 통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