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컴퓨터와 인간의 체스대결은 컴퓨터의 힘겨운 승리로 끝났다. 인간의 이지(理智)도 일취월장하는 기계의 능력앞에 위협받는 듯하다.
컴퓨터와 인간이 음악연주 대결을 벌인다면 어떨까. 1초에 수억번의 연산으로 최상의 묘수를 찾는다는 슈퍼컴퓨터라도 인간의 감성앞에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 최소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 우리의 기대다. 그러나 지극히 미세한 강약대비나 매끄럽고 결이 고른 터치만을 겨룬다면 기계의 비교우위가 입증될 지도 모른다.
단 아직은 인간이 안심할 수 있다.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뇨프의 신작앨범 「쇼팽 리사이틀」(DG)은 사람의 손목과 손끝으로 지어내는 고른 타건(打鍵)의 극한을 보여준다. 연습곡 작품10의 단조에서 자유분방하고 또랑또랑하게 흐르는 오른손의 선율이나 소나타3번의 첫악장에서 왼손이 쓸어올리듯 나지막하게 반음계를 구사하는 모습은 고도로 잘 프로그램된 「건반기계」를 연상케 한다.
단지 고른 타건만이 이 음반의 강점은 아니다. 주의깊게 설계된 완급의 기복, 손가락 마다 각기 달리 표현되는 음색, 그 어울림은 한없이 많은 색깔을 지어낸다. 1초에 수억번의 연산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일까. 음반에 수록된 10곡중에는 「환상곡 f단조」를 시작으로 「즉흥곡 장조」 등 내성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 대부분이다.
『명연을 평범한 연주와 구별짓는 것은 미세한 뉘앙스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보라』 자신의 강점을 잘 이해한 플레트뇨프의 말이다. 스스로를 전설적 명인 호로비츠와 비교한 셈.
그러나 이 음반에는 기교와는 별도로 호로비츠의 음반을 누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90년대 녹음기술의 치밀함이 그것이다. 한없이 정적에 가까운 피아니시모도 투명하게 소화해내는 정밀함. 분명 호로비츠의 전성기에는 꿈꿀 수 없었던 것이다.
작년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집으로 그라모폰 음반상을 수상했던 플레트뇨프는 오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갖는다. 작년5월 러시아 내셔널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내한한 뒤 1년만의 무대다.
〈유윤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