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스산한 바람과 함께 시작된다.
시작뿐 아니라 이 작품에서 바람은 고비고비 무대를 폭풍속으로 밀어 넣는 가장 중요한 「등장 인물」 역할을 한다. 시대를 휩쓴 사상의 격랑. 그 속을 덧없이 흘러간 사람들을 그려내기 위해 섬세한 연출자 한태숙은 대형 강풍기를 무대 뒤에 세워 커튼이 펄럭이며 객석까지 일렁일 듯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여간첩 김수임」 「한국판 마타하리」로 알려져온 김수임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연극 속에는 김수임(윤석화 분)과 이강국(한명구)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나 스파이 영화 같은 아슬아슬한 첩보전, 수임의 불행한 성장 과정과 대비되는 화려한 상류생활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제작진이 작정하고 만들었다면 충분히 신파극 또는 진한 멜로드라마도 될 수 있는 소재였다.
「나, 김수임」이라는 타이틀대로 작가 정복근이 주목한 것은 「나」라는 인간이었다. 일그러진 시각에서 해석되어진 인물과 사건들을 바로 보기 위한 「현대사 재조명 시리즈」 첫번째답게 이 작품은 「사람이 중하지 사상이 중해요」하고 묻는 자유인으로서의 수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된 무대는 법정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 헌병사령관과 동거하던 김수임은 오랜 애인 이강국과 남로당 간부를 월북시킨 혐의로 재판정에 선다. 그를 빨갱이로 몰고 가려는 재판부와 화장기없는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윤석화,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치열한 심리전이 시작된다.
조명은 이때부터 제 목소리를 내는 또 하나의 「등장 인물」이다. 피고인석의 윤석화를 비추는 날카로운 한줄기 빛은 시퍼렇게 칼을 갈아 가지고 내려와 관객의 심장을 찌른다. 정녕 김수임이 죄인이냐고.
『난 간첩이 아냐. 이렇게 죽을 수 없어』하고 절규하던 수임이 쓰러지면 세번째의 「등장 인물」 영상이 무대를 가득 뒤덮어 객석을 전율케 한다. 어린 아들의 얼굴, 해맑게 웃는 수임, 다시 울상짓는 아이, 전쟁, 그리고 수임이 사랑했던 이강국…. 바람에 일렁이는 영상들은 사상의 덧없음과 삶의 아이러니를 말없이 전해준다.
윤석화가 없었다면 김수임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 여배우로서 우리시대 최고의 카리스마를 지닌 그는 절제와 응축으로 농밀한 김수임의 내면세계를 그려냈다. 50년대를 재현한 의상부터 전화기 한대까지 공들인 무대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황장엽이 망명하는 세기말의 오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 생각케 한 제작자(동숭아트센터)의 혜안이었다. 8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02―3673―4466
〈김순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