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가을은 더이상 하늘은 높고 바람은 맑아 그윽하게 깊어가는 계절이 아니었다. 굳게 닫힌 교문. 차갑게 빛나는 쇠창살. 그 사이로 교정(校庭)을 훔쳐봐야 했던 쓸쓸한 젊음. 교정은 홀로 가을을 품은 듯 적막감에 갇혀 있었다.
시간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려는 듯 지향없는 혼돈에 빠져드는 요즘, 그래서 유신의 악령이 미래의 성령으로 숭배되기도 하는 지금, 70년대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꺼내어 상처를 들추는 이가 있다.
「행촌아파트」의 작가 이선씨(43). 70년대 대학 4년내내 가을학기마다 휴교령의 된서리를 맞아야 했던 그. 그가 붉은 잉크로 지워진 채 세월의 갈피 속에서 퇴색해 가는 유신의 공포와 「침묵」을 장편소설에 담았다.
「우리가 쏘아올린 파이어니어호」(열림원)가 이달말 출간된다. 이 장편은 이번에 함께 나온 창작집 「귀신들」(민음사)에서 보는, 특유의 입심과 중년의 「수다스러움」을 상당부분 떨어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유신시대를 그대로 「떠서 담듯」 그렸다. 「입말」의 묘미는 세세한 묘사 속에 침잠하듯 숨을 죽인다.
『혹성탐사선인 파이어니어호는 절망을 쏘아 희망을 건지려 했던, 그 암담했던 시절의 구원을 상징해요』
소설에는 유신의 풍물처럼 너무도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운동권 학생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도 왠지 자신의 삶이 「헛디딘」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지는 학생과장 신교수.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장학금 때문에 학생회 간부 일을 하고 있는 동숙. 그리고 그 시절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운동권 딸을 가진 아버지 등등….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야 그 시절의 「침묵」에 진 빚을 갚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알았지요. 70년대의 침묵이 그렇게 부끄럽지만은 않았다는, 정말 「지독한」 시간을 잘도 견뎌왔다는…』
「…파이어니어호」가 「휘황한」 오늘날 파묻힌 역사의 상흔들을 찍어 발신한다면 중단편을 모은 「귀신들」은 인간관계에서 숨겨진 상처를 「까발기고」 있다. 작가는 우리의 일상이, 그 일상을 떠받들고 있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기실 위선이라는 악덕에 기대고 있음을 가차없이 폭로한다.
「형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며」에서 이 위선은 돈 벌러 월남으로 간 형에게 돈에 기갈이 난 동생이 쓴 편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라를 위해 머나먼 타국 땅까지 싸우러 가신 형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표제작인 「귀신들」에서 다정했던 가족들은 막내의 빚을 떠맡아야 할 상황이 벌어지자 피붙이들은 서로에게 진저리치게 하는 아귀들로 변하고 만다.
『역사의 상처가 됐든 사람살이의 아픔이 됐든 「상처의 응시」, 아니 그 상처에 다시 생채기를 내고 「덧내고서야」 진정한 고해(告解)와 화해에 이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작가의 목소리는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네 마음 속에 감춰둔 상처가 있다면 오래 참지 말아라. 차라리 네가 느끼는 고통보다 몇배 부풀려 엄살을 피워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 상처야. 아무런 증세없이 자멸할 뿐인…」.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