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았다는 것이 그저 자랑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무딘 심성이었으면 그처럼 처절한 역사 속에서 정신과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순수한 마음이라면 어떻게 거기서 살아 남았고 그 모든 것을 참아 넘겼겠는가」.
지명관 한림대교수(73).유신의 와중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침묵에 갇힌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면서 날카로운 비판의 장을 열었던 유랑(流浪)의 지식인.
그가 93년 귀국한 뒤 군사권력은 사라졌으나 아직도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전제정치의 회색 배경」, 그 사상적 역사적 연원을 더듬은 글들이 한권의 책으로 나왔다.
「서울의 찬가, 서울의 애가」(대화출판사).
20년이 넘는 이국생활 끝에 다시 찾은 이 땅에서 부르는 노래는 「서울의 찬가」가 아니다. 고된 역사 속에서 먼저 가고야 만 「더 많은 재능을 가진, 더욱 선량한 벗들」을 떠올리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읊는다.
그들에 대한 레퀴엠으로 읽히는 그의 글은 숙연하다.「그들이 내 눈앞에 나타나서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라고 비웃을 것만 같다」는 자책과 회한이 곳곳에 스며있다.
우리는 해방 이후 남북분단을 택하고 오늘과 같은 벽을 구축할 수 밖에 없었던가. 근대화를 외칠 때 군사독재 외에는 선택이 없었던가. 저렇게 많은 깨끗한 얼굴들이 희생되는 것말고는 정말 달리 길이 없었다는 말인가….
문명의 소요(騷擾)가 싫은 저자.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18세기의 루소, 월든 연못가에서 손짓하던 19세기의 헨리 소로를 그리워했던 그. 그런 그를 「반역의 열정」으로 휘몰아 간 것은 광주 5.18이었다.
「나라 밖에서 편히 있으면서 침묵한다는 것, 비판한다고 해도 숨어서 말한다는 것이 광주의 희생 앞에서 너무 비열하게 느껴졌다.… 나는 일본에서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그가 지금 이 땅에서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은 투쟁이 끝난 뒤에도 씻겨지지 않는 「피묻은 손」의 강경논리, 흑백 이분법이다.
그는 친일파 논쟁에 대해 「그 시대를 바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흑백을 분명하게 갈라야 했다」며, 그러나 「그것이 조국이 해방된 날 동지들 사이에서 나와 너를 나누는 것으로 내면화됐던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브레히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애의 땅〉을 준비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이미 우리 사이의 〈우애〉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