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승희,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 펴내

  • 입력 1997년 7월 29일 07시 42분


『바닥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요.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자는 생각도 있었고요. 나이탓도 있겠지요. 나이 사십을 환기시키자는…』 시인 김승희씨(45). 그가 소설을 쓰는 세가지 이유다. 또 있다. 『나 자신의 자폐증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몰라요. 자의식이 넘쳐 폐쇄회로처럼 제자리를 빙빙 도는…. 엔트로피가 너무 증가한 나머지 더 이상 정신의 탄소동화작용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나 할까』 지난 94년 「불현듯」 소설가로 데뷔, 문단을 놀라게 했던 김씨. 그간 발표했던 중단편을 모아 첫 소설집을 냈다. 내달 5일 출간되는 「산타페로 가는 사람」(창작과비평사). 그의 시는 줄곧 「솟구침」, 지상에서 중력(重力)과 벌이는 「가장 무거운 싸움」인 솟구침의 미학을 노래해 왔다. 그래선지 그의 시는 거개의 언어를 죽이고서야 비로소 생명을 얻어내는 부정(否定)의 문법으로 일관해 왔다. 이에 비해 소설은 솟구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갇힘의 현실, 시 제목이기도 한 「달걀 속의 生」을 잔인하리만큼 찬찬히 응시한다. 박차고 솟구쳐 마침내 「저」 창공의 광활함에 이르고자 했던 시인이 뒤돌아본 「이」 옹색한 지상의 이야기. 시에서는 관념과 사변에 묻혀 흐릿했던 시대의 아픔, 역사의 상처가 선명한 이미지로 그 이지러진 얼굴을 들이민다. 단편 「회색고래 바다여행」에서 그 이미지는 맥도널드 햄버거의 상호를 가리키는 알파벳 「M」. 밤의 네온사인에 빛나는 「M」자는 하늘에 내걸린, 「잘려나간 여자의 유방」으로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주인공의 고통스런 과거가, 무의식이 현재의 의식을 뚫고 표출한다. 「광주 민중항쟁 사망자 명단 54번:손옥례. 여 19세. 여고 졸. 취업준비. 사망일시 및 장소:80,5,21.장소 불상. 사인:총상 및 자상. 비고:유방자상 희생자」. 그러나 시인이 쓰는 소설은 시에서와는 달리 「지상의 긍정」, 화해의 의미에 대해 나지막하나마 분명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과 5.18이 겹쳐지는 중편 「13월의 이야기」를 보자. 소설 속의 현실은 여전히 답답하다. 「(5.18을 저지른) 그런 군인 아저씨에게 어떻게 위문편지를 써요」하고 울었던 나.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왔던 나. 흑인들의 난동을 방관하는 미국경찰을 향해 「어떻게 이것이 미국이에요」라고 절규하는 한인 상인들. 그리고 관동대지진과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구분할 수 없어 「돌아버린」 할머니. 그러나 주인공은 엄마에게 띄운 편지에서 「한(恨)이 있는 곳에 집이 있다」고 끝을 맺는다. 「전에는 한이 있는 곳은 집이 아니라고, 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한국 떠난 것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젠 한이 있는 곳에 집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렵니다. 한이 없는 곳엔 집도 없다고요. 한이 있는 곳에 별이 뜬다는 것을요…」.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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