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정도전]「민본개혁」꽃피운 사상가

  • 입력 1997년 9월 9일 07시 57분


《시대가 선비를 만드는가, 선비가 시대를 이끄는가. 법이 흔들리고 원칙이 무너지는 이 시대, 고결한 선비정신과 번득이는 지혜로 난국을 극복해온 선현들을 떠올린다. 하늘과 대화하고 민초들의 삶을 걱정했던 큰 선비들의 궤적을 거슬러 좇아보는 「새로 쓰는 선비론」을 시작한다. 정도전 조광조에서부터 정약용 최익현 박은식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성 20여명의 사상이 오늘과 미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아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흔히 선비라면 조용한 학자를 떠올리지만 삼봉(三峰)은 최고학부인 성균관 강학(박사) 출신의 학자이면서도 유약한 선비가 아니었다. 한 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었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영웅 호걸형의 선비였다. 그래서 그의 붓은 문명개혁의 고전(古典)을 만들어냈고 그의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 난세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영웅 호걸형 선비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의 일생을 보면 이것이 한사람의 업적인가를 의심케한다. 고려 우왕 때의 귀양살이와 귀족들의 탄압, 혈통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공양왕 때의 감옥살이, 그리고 조선 개국후 요동정벌운동으로 야기된 명나라와의 갈등,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낸 것도 보통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정치 경제 철학 역사 병법 의학 문학을 넘나드는 박학한 지식과 경륜을 담은 수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더욱 비범하다. 57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태우고 간 그 열정과 인내와 지혜와 재능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는 자기 시대를 누구보다도 분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난한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부를누리는권문세족의횡포, 망해가는 원나라를 섬기며 신흥하는 명나라에 등을 돌리는 외교의 어리석음, 뇌물과 청탁의 줄서기로 벼슬이 오가는 부패한 정치, 왜구떼들이 수도 개경을 노략질하는 한심한 국방력, 이 모든 것을 조용하게 관망하기에는 삼봉의 가슴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는 최고학부에서 쌓은 성리학의 지성, 핍박 속에서 단련된 농촌적 야성을 겸비한 점에서 일반 선비들과는 체질이 달랐다. 그가 단순히 권력을 잡으려고만 했다면 그토록 위험한 도박에 수없이 목숨을 걸고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첫 귀양을 갈 때부터 사람은 한번 죽는다는 비장한 시를 남겼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는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자. 썩은 정치를 정화하고 무너진 도덕을 일으켜 건강하고 튼튼한 나라를 세우자.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열정과 이상이 바로 삼봉을 그토록 건강한 선비로 만든 것이다. 그의 글에는 구절마다 백성을 사랑하는 꿈과 이상이 녹아 있다. 선비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하여 삼봉만큼 명쾌하고 또 진실하게 답한 이도 드물 것이다. 그 답은 책상 위에서 쓴 것이 아니다. 그가 보고 느낀 많은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들을 담아낸 것일 뿐이다. 그는 성리학을 국교(國敎)로 정착시킨 탁월한 학자였지만 송나라 선비를 모방하는 교조적 성리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경륜 속에는 수천년 쌓아온 동양의 지혜가 녹아있으면서도 전혀 현학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삼봉의 글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호소력이 있다. 부정으로 축재한 부자의 땅을 백성에게 되돌려주는 것에서부터 개혁의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관념적 애민(愛民)이 아니라 요즘 말로 하자면 경제정의 실현과 실업자 구제에 민본정치의 핵심을 둔 것이다. 6백년 전의 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경제개혁이다. 뇌물과 줄서기로 이루어지는 인사제도, 놀고 먹는 관료를 혁파하는 것에서 정치개혁의 단서를 열었다. 그 대안이 엄격한 고시제도와 교육진흥으로 나타난 것이다. 입헌군주제는 정치개혁의 마지막 목표였다. 세습군주제는 정치의 안정을 담보하는 장점이 있으나 군주의 능력을 보증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통치의 기준이 되는 법전을 만들어 군주의 자의적인 인치(人治)를 막고 백성 중에서 뽑힌 검증된 정치인인 관료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자는 것이다. 그것이 재상(宰相)중심제이다. 특히 권력의 부패를 막기 위한 언론과 감찰제도의 기능이 무엇보다 강조되었다.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이 이러한 목적에서 쓰여진 정치이론서이다. 마키아벨리를 능가하는 명저다. 잃어버린 요동땅을 다시 차지하고 왜구가 넘보지 못하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는 것도 그의 꿈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진법(전술)을 개발해 군사를 훈련하고 권력투쟁에 이용되고 있던 권세가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국가의 공병(公兵)으로 만들려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 실험정신은 그를 죽인 이방원(李芳遠)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 역사를 사랑하고 조상을 존경했다. 그래서 개국시조인 단군과 도덕군주인 기자(箕子)의 위상을 높이고 그 시대의 영광을 부활시키기 위해 「조선」이라는 국호가 선택된 것이다. 고려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것도 삼봉이다. 오늘 우리의 수도인 서울의 설계자가 삼봉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5부 49개 방(坊), 경복궁의 전각, 4대문과 4소문의 이름들이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 그 이름 속에는 무궁토록 도덕이 꽃피고 힘이 있는 이상 국가를 염원하는 그의 꿈이 서려 있다. 그는 「신도팔경시」에서 새로 건설된 수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자랑스럽게 그려냈다. 강도높은 불교비판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정화는 그가 추구하는 문명개혁의 중심축이었다.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순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지나치게 세속화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미치는 역기능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동양에서 가장 강도 높은 불교비판서를 썼던 것이다. 「불씨잡변」으로 대표되는 그의 불교비판은 학문적으로는 다소 오류가 있다. 하지만 타락한 불교계에서는 감히 그 오류를 지적하지 못했다. 불교와 정치의 유착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엄청난 문명개혁이었다. 역사는 한 사람의 영웅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삼봉은 군계(群鷄) 중의 일학(一鶴)이었다. 이미 6백년 전에 그는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삼봉이 있음은 우리의 행운이었고 희망이다. ▼ 글:한병우 ▼ 약력 △서울대교수(국사) 문화재위원 △서울대 서울대대학원 사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서울대 규장각 관장 △저서 「정도전 사상의 연구」 「조선전기 사회사상연구」 「한국민족주의 역사학」 등 ▼ 그림:김병종 ▼ 약력 △동양화가 서울대교수(동양화) △서울대 회화과 서울대대학원 동양화 전공 △프랑스 몽트니화랑 초대전 등 국내외 개인전 13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미술기자상」 등 수상 △영국 대영박물관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 작품 소장 △저서 「중국 회화의 조형의식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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