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지음/학고재 펴냄]
창밖에 바람이 부나 보다. 해바라기 마른 잎 부딪치는 소리가 소소하기만 하다. 낮에도 귀뚜리가 운다. 누군가 부르고 싶고 어딘가 가고 싶고 무엇인가 간절해지는 마음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가을날이다. 이렇게 마음이 그 어디에 가 닿지 않을 때 나는 내 책상머리에 늘 꽂혀 있는 책을 뽑아들고 아무곳이나 펼친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이다.
아무데나 펼쳤더니 화엄사의 사자석탑을 이야기한 페이지가 나왔다. 「탑이 서 있는 나지막한 이 언덕은 이 탑이 세워짐으로써 아름다움의 생명력이 샘솟는 곳이 됐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신기한 일인지…」. 나는 이 구절을 읽는다. 이 땅에 아무곳에 아무렇게나 지어지는 집들을 생각하며, 몇해전에 그렇게나 서정적이던 내가 사는 마을 앞 징검다리가 무참하게 헐리고 거기 아무렇게나 본때 없이 놓인 다리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분노와 허탈감에 젖어 괴롭다.
이 책은 혜곡 최순우 선생의 글을 추려 묶은 것이다. 이 책에는 선생이 살아 생전 이 땅의 산천과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 문화유산들을 얼마나 따뜻하고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쓰다듬으며 사셨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지식으로 눈길로 쓴 글들이 아니다. 이 책의 모든 글은 이나라 백성들의 순박하고 그지없이 아름다운 삶과 역사를, 이 나라 산천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글들이다.
이 나라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시냇물 한 줄기, 산모퉁이 하나, 무심하게 뜬 달빛 아래 흔한 산능선, 가을 햇살 아래 샛노랗게 익어가는 산골짜기 벼들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거기에 사는 우리 조상들의 순박하고 고왔던 정을 이해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그러한 정겨운 산천의 모습들이 아름다운 예술로 피어났음을 이 책은 차분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의 모든 글을 아껴가며 읽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짧은 글인 분청사기철회초문대접이란 글을 제일 좋아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선생이 우리 것을 그 얼마나 지극하고도 소중하게 마음으로 쓰다듬으셨는지 가슴이 다 찡해지곤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앎이 사람의 마음에 가서 사람을 가다듬어 사람의 그윽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져 나올수도 있구나 하는 참으로 고귀한 생각을 얻었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늘 고맙게 생각하며 산다.
김용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