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감수성의 언어들이 마치 한무리의 송사리떼처럼 한꺼번에 우, 몰렸다가 쏜살처럼 흩어지는 그 짧은 순간. 획, 잡아당기는 메타포의 촘촘한 그물망.
그 섬세하게 짜인 그물망에 건져올려진 것은 단지, 가을을 흐르는 차가운 물비늘 몇조각. 그리고 그물을 빠져나간 물고기들의 아슴푸레한 흔적, 또는 그 흔적의 그늘….
그의 소설은 그렇다.
소설가 조경란씨(28).
그의 첫 창작집 「불란서 안경원」(문학동네)은 뭐랄까, 은유와 상징의 집, 아니 은유의 새떼들이 잠시 깃들였다 떠나버린 둥지처럼 휑, 빈자리만 느껴진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스토리가 없이는 감동이 없는, 소설의 관성(慣性)을 배반하는 떨림이 오래 남는다.
왜 그럴까. 먼저 그의 소설에는 거개의 90년대 새내기 작가들에게서 느껴지는, 귓전을 윙윙거리는 현기증이 없다. 공허한 독백과 내면탐닉의 무력감 대신,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문체에서 뿜어나오는 싱싱함이 느껴진다.
「푸른 나부(裸婦)」를 보자.
작가의 시적충동이 「저지른」 문체의 화염(火炎)과, 소설가의 숙명적인 덫인 스토리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양자의 충돌과 긴장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작품은 많은 오독(誤讀)을 낳았다.
『「귀」에 관한 이야기지요. 「귀 콤플렉스」를 지닌 여자의 이야기, 귀에 관한 한 아직 덜 진화한, 또는 진화가 진행중인 여자의 이야기. 이 여자는 항상 머리칼로 귀를 덮고 다녀요. 세상과의 통로를 닫고, 스스로를 유폐시키지요』
스물아홉의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열일곱의 가출소녀에게 걸려든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걸려들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가출소녀는 목욕탕에서 그녀의 가방을 훔쳐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낸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녀 주변을 배회하며,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온다.
오랜 신경전이 오고간 뒤, 마침내 소녀는 그녀의 집을 찾아온다. 새벽 세시에. 「눈을 감고 있으면 감은 눈 속으로 세상의 모든 검은 그림자들이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 시간에.
그녀는 아무말 없이 소녀를 집안에 들인다. 그리고 옷을 벗기고, 「어린 묘목같은」 소녀의 몸을 깨끗이 씻어준다.
그리고 그날 밤 꿈 속의 일처럼, 「깊게 웅크리고 있던 내 귀에 한없이 보드라운 숨결이 닿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칸나처럼 뜨거운 여자애의 입술이었다…」.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끄는」 힘은 귀의 성적인 이미지와 현실적인 실체를 움켜쥐려는 동성애적 욕구다. 그러나 작가는 끔찍한 오역이라고 질겁한다.
『동성애로 보든 그렇지 않든 그걸 시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소설의 동성애 장면은 「닫힌 귀」를 열기 위해 거치는 어떤 제의(祭儀) 같은 거지요.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마도 이런 혼란은 명백한 서사(敍事)마저도 이미지와 상징구조에 종속시키려는 작가의 글쓰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동성애 장면은 「세상과의 접속」이라는 은유의 소도구로 차용됐지만 그 묘사가 너무 강렬해서 이미지를 압도하는 리얼리티를 획득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소설은 동성애를 통해 자기긍정에 이르는, 그리고나서 비로소 세상에 눈을 열어가는 나르시시즘의 행로(行路)로 읽혀지기도 한다.
작가의 실제 모습은 소설속의 「그녀」들과 많이 닮았다. 백지장처럼 하얀 피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 흑백의 음영만이 서늘하게 여운을 남기는 자그마한 얼굴….
현실을 밀어내려는 이미지와 상징의 문체로 견고하게 무장한 작가. 그리고 스물아홉 서른 또는 그 얼마쯤 된, 자신들의 나이가 너무 무거운 소설속의 「그녀」들.
작가는 어쩌면, 그녀들을 통해 삶의 무의미를 견디며 위안처럼 메타포의 안개를 헤쳐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 사귀지못하는 그녀들의 「실존적 동기」에 연민을 느끼면서….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