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作「우리들의 죽음」,70∼80년대 민초들애환 생생

  • 입력 1997년 10월 14일 07시 59분


연탄가스 중독으로 단칸셋방 일가족이 숨지는 비극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붉은 깃발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시위대의 풍경. 이것도 이젠 왠지 16세기 난파선처럼 낯설다. 이념이 사라지고 소비가 홍수를 이루며 인스턴트가 판치는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들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은 허전함은 무엇인가. 뇌리 저편에 희미하게 숨쉬고 있는 따스한 인간의 「속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개국」 「객사」 「낙동강」 등 장편 역사소설로 친숙한 소설가 이태원씨(55). 그가 28년 동안 간간이 써온 중단편을 모아 「우리들의 죽음」(두로)이란 소설집을 냈다. 이씨의 장편소설은 조선시대와 구한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것. 이번 소설집은 70∼80년대를 관통한다. 막노동자 마부 창녀 등 민초들의 애환, 그리고 부조리에 대항하지 못하는 인텔리의 고뇌가 담겨 있다. 그는 이번 작품을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 역사소설로 불러달라』고 한다. 「휘황찬란한 꿈의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이제는 잊혀져 가는 지난날의 상처를 새삼스레 왜 들추는 것일까. 『시대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또 변하지 말아야 할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와 가난이라는 구시대의 거대한 장벽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는 찾아보기 힘들어요』 이씨는 역사성과 사회성이 없는 문학의 오락화도 걱정한다. 「우리들의…」에 담긴 7편의 이야기는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해학적인 묘사로 인간적 체취를 물씬 풍긴다. 단편 「밤길」의 주인공이 「하는 짓」이 그렇다. 사창가에 있는 옛 애인을 구한다는 「어리석은 순수함」으로 무장한 청년. 노동판에서 쫓겨난 청년은 노상강도로 「전업」한다. 그러나 만나는 게 하나같이 자신보다 나을 게 없는 밑바닥 인생들. 교통사고로 감옥에 갇힌 아들을 면회온 무일푼 아줌마, 노동자의 편을 들다 직장에서 쫓겨난 초라한 가장, 그리고 창녀생활로 몹쓸 병에 걸린 처녀 등등. 『사변(思辯)은 되도록 피하자는 게 저의 신념입니다. 이념 자체보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묘사를 꺼리는 사람들의 추악한 부분까지도 생생하게 보여주려 합니다』 〈한정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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