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였을까.
부인 신사임당과 아들 이율곡의 이름에 가려진 이원수(李元秀)라는 인물.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율곡문집에 「진실하고 정성스러워 꾸밈이 없으며 너그럽고 검소하여 옛사람다운 기풍이 있었다」는 짤막한 구절이 남아 있을 뿐.
이원수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 외아들로 자랐기 때문인지 우유부단한 편이었다.
이원수는 강릉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직후 신사임당은 남편을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남편에게 「10년 별거」를 제안했다. 10년동안 떨어져 오직 학문에만 매달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혼의 달콤함을 떨치고 학문에 정진할 만큼 결단력과 의지를 갖추지 못한 이원수는 아내 곁을 떠나지 못했다. 신사임당이 계속 재촉하자 마지못해 집을 떠나기는 했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번번이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제일 멀리간 곳이 강릉집에서 겨우 40리. 그러나 결국 대관령을 넘지는 못했다. 남편의 유약함에 지쳐버린 신사임당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지 않으면 차라리 신사임당 자신이 머리를 자르고 산에 들어가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원수는 뜻을 정하고 서울로 올라와 3년동안 공부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이원수가 수운판관이란 벼슬을 지낸 것도 부인의 의지 덕택이었다. 세상을 떠난 뒤엔 의정부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지만 이것도 성공한 아들 덕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원수의 「진실과 겸손」은 율곡의 인격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1세때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자 자신의 팔을 찔러 피를 내 아버지 입에 넣어드렸던 율곡, 그리고 아버지 대신 자기가 죽게 해달라고 빌었던 율곡. 아버지의 순수한 심성에 감화되지 않았더라면 율곡의 효심도 불가능했으리라.
〈이광표기자〉